경신환국은 1680년(숙종 6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조선 조정에서 집권당이었던 남인 세력이 대거 실각하고 서인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정치적 사건입니다. 경신년에 정국이 급격하게 바뀌었다는 의미에서 경신환국이라 불리며, 경신대출척 또는 경신사화라고도 합니다. 환국이란 갑작스럽게 정국이 뒤바뀐다는 뜻으로, 역사적으로는 숙종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한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 후기 붕당정치의 흐름을 크게 변화시킨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후 하나의 정치세력이 정국을 독점적으로 주도하는 일당전제화의 경향이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신환국의 역사적 배경
경신환국이 발생하기 전 조선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송논쟁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조반정으로 연립정권을 구성했던 남인과 서인은 효종이 승하한 후 그의 계모인 장렬왕후 조씨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을 두고 1차 예송인 기해예송에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은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인 차자이므로 1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허목, 윤선도, 윤휴 등 남인은 왕통을 이은 효종은 장자로 대우받아야 하므로 3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차 예송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서인 주도의 정국이 오랫동안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1670년(현종 11년) 무렵부터 현종은 남인인 허적을 극진히 예우하며 국가와 군사에 관한 대소사를 일임하고 관직 제수 시 반드시 그의 의견을 듣는 등 깊이 신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김우명, 김좌명을 중심으로 한 청풍 김씨 외척의 힘도 작용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인이었지만 송시열 등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인과 제휴하여 정국의 구도를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1674년 현종 15년에 발생한 2차 예송인 갑인예송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면서 남인 주도의 정국이 조성되었습니다.
갑인예송이 마무리될 즈음 현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14세의 어린 나이로 숙종이 즉위하면서 정치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허적이 원상이 되어 국정 현안을 처리하고 있었으며, 조정은 점차 남인들로 채워져 갔습니다. 하지만 숙종은 아버지 현종이 예송논쟁에 휩싸여 신권에 끌려다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즉위 직후부터 왕권 강화를 위해 강력한 정치 의지를 보였습니다.
경신환국의 발단과 전개 과정
경신환국의 직접적인 발단은 1680년 3월 19일 발생한 이른바 유악 사건입니다. 숙종은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의 조부 허잠에게 시호를 더하여 내려주는 것을 기념하는 잔치에 필요한 물품들을 넉넉하게 내려주라고 명했습니다. 이날 비가 내렸기 때문에 숙종은 배려 차원에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기름칠한 천막인 유악을 보내주려고 했으나, 허적이 이미 왕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유악을 먼저 가져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숙종은 이 일에 크게 노하여 패초로 군권의 책임자들을 급히 불러 전격적인 인사조치를 단행했습니다.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 수어사에는 김익훈 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여 남인이 장악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다음날인 3월 20일에는 철원에 귀양을 가 있던 서인의 핵심 인사 김수항을 사면하고 남인인 이조판서 이원정을 파직시켰습니다. 숙종은 허적이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붕당 간의 화합에 힘쓰지 않고 사태를 관망했다며 비판하고 사직을 권유했으며, 결국 허적은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같은 날 허적의 세력인 윤휴와 민암의 삭탈관작과 귀양을 건의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숙종은 이를 허락했습니다. 4월 3일에는 영의정에 김수항, 좌의정에 정태화, 도승지에 남구만을 임명함으로써 서인 주도의 정국이 완전히 조성되었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정국 전환은 표면적으로는 허적의 오만한 태도에 대한 숙종의 분노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숙종의 강력한 정국 주도 의지가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삼복의 변과 남인 세력의 축출
서인계 인사들이 조정에 대거 진입한 후, 정원로에 의해 이른바 삼복의 변이 고변되면서 경신환국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삼복의 변은 인조의 손자이자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허적의 서자 허견이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정원로의 고변에 따르면,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으며, 도체찰사부 소속 이천 둔군을 특별히 훈련시켰다고 했습니다.
도체찰사부는 효종 때까지 전란과 군비의 필요성으로 상설되었으나 현종 때 폐지되었다가, 숙종 초에 삼번의 난 등 중국 쪽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윤휴와 허적 등의 주장으로 1676년 정월에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허적은 훈련도감과 어영청 등 서울의 군영도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일원화하자고 건의했으나, 김석주 측의 반대로 다음해 6월에 일시 혁파되었습니다. 그러나 1678년 12월 허적의 주장으로 다시 설치되었고, 숙종은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여 견제했습니다.
삼복의 변이 도체찰사부 군사의 동원 문제로 귀착됨에 따라,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계된 남인계 인사들이 모두 연루되게 되었습니다. 허견과 삼복뿐 아니라 허적, 윤휴, 유혁연, 이원정, 오정위 등 남인계의 중진들이 많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허적이 역모에 직접 관련되었다는 결정적 단서가 나오지 않아 숙종은 이들을 방귀전리, 위리안치, 감사정배 등으로 처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사되었습니다.
경신환국의 주요 인물과 정치 세력
경신환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복잡한 정치 세력 구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당시 주요 정치 세력은 송시열과 송준길을 중심으로 한 서인 산당, 김좌명과 서필원 등의 한당, 원두표와 이후원 등 일반 관료군, 허적과 오정창 등의 남인계 관료군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력 구성 외에도 왕실과 가까운 종실 세력과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숙종은 어릴 때부터 삼복이라 불렸던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총애했기 때문에 이들은 종친임에도 정국 운영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외가인 남인 오정창 형제들, 외척인 청풍부원군 세력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남인계 관료인 허적도 이들의 배려 속에 출사하여 정국을 남인 주도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숙종 대 초반의 정국은 삼복 형제와 청풍 김씨 외척, 남인 관료군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인예송의 여파로 송시열이 지나치게 수세에 몰리고 남인들이 큰 세력을 형성하자, 외척 김석주 측은 남인들을 적절히 제어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숙종마저 송시열을 제외한 나머지 서인 산당 계열을 다시 조정에 부르려고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외척 세력은 남인 관료군들과 삼복 형제들을 중심으로 한 종친 세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복창군과 복평군이 궐내에서 궁녀와 간통했다는 일을 김우명이 상소한 것이었으며, 이는 외척과 종친 세력 간의 균열이 완전히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경신환국에서 김석주와 김만기 등의 외척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삼복의 변을 고발한 사람은 정원로였으나, 이 역모를 애초에 눈치 챈 사람은 김석주와 김만기 등의 외척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신환국이 단순한 붕당 간의 대립이 아니라 왕실 외척 세력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경신환국의 역사적 의의와 영향
경신환국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이 사건 이후 하나의 정치세력이 정국을 독점적으로 주도하는 일당전제화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남인과 서인 간의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한 공존의 정치질서가 유지되었으나, 경신환국을 계기로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둘째, 경신환국은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환국 정치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첫 사례였습니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이 예송논쟁에 휘말려 신권에 끌려다니는 것을 보며 강력한 왕권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환국이라는 방식을 통해 붕당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이른바 용사출척권을 통한 환국 정치는 이후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으로 이어지며 숙종 재위 기간의 특징적인 정치 양상이 되었습니다.
셋째, 경신환국은 군권과 병권의 장악이 정치권력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숙종이 유악 사건을 계기로 가장 먼저 단행한 조치가 훈련대장, 총융사, 수어사 등 중앙군영의 군권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기는 것이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또한 도체찰사부를 둘러싼 남인과 서인의 갈등, 그리고 삼복의 변이 도체찰사부 군사의 동원 문제와 연결되었다는 점도 군권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넷째, 경신환국은 단순한 붕당 간의 대립이 아니라 외척 세력, 종친 세력, 관료 세력 등 다양한 정치 집단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환국의 시기에 붕당정치의 틀로만은 수용할 수 없는 다양한 정치 현상과 정치 집단들이 등장했음을 보여주며, 조선 후기 정치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가 됩니다.
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은 재집권에 성공했으나, 곧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의 분립이 진행되었습니다. 그중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은 송시열과 삼척으로 불렸던 왕실의 외척, 즉 김석주, 김만기, 민정중의 연합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9년 후인 1689년 남인계 후궁 장희빈이 낳은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는 기사환국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송시열과 김수항 등이 사사되었고, 경신환국으로 사사된 허적과 윤휴는 다시 복권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5년 후인 1694년에는 장희빈이 사사되면서 갑술환국이 일어나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환국들은 숙종 재위 기간의 정치를 격렬하고 역동적으로 만들었으며, 붕당 간의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국왕이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어 영조와 정조 대의 탕평정치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배경을 제공했습니다. 경신환국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으로, 오늘날까지도 깊이 있는 연구와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