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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옥사 : 광해군 5년에 발생한 조선 시대의 대규모 정치 사건

by NewWinds 2025. 2. 20.

계축옥사(癸丑獄事)는 1613년(광해군 5년)에 발생한 조선 시대의 대규모 정치 사건으로, 서인 세력과 영창대군(선조의 유일한 적자)을 지지하던 남인계 소북파 인사들이 숙청된 사건입니다. 이는 광해군의 왕권 강화를 위한 정적 제거 작업이었으며, 영창대군의 비극적인 최후와 인목왕후의 폐비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계축옥사의 배경

  1.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대립
    • 광해군은 선조가 생전에 책봉한 세자였으나,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인목왕후 소생)이 태어나면서 왕위 계승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 선조는 소북파를 중심으로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선조 사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2. 소북과 대북의 갈등
    • 광해군 즉위 후, 실권을 장악한 대북파(이이첨, 정인홍 등)는 소북파와 영창대군 지지 세력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 이 과정에서 계축년(1613년)에 대규모 숙청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계축옥사의 전개

  1. 영창대군의 숙청
    •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있었다"고 조작하여 영창대군과 관련된 신하들을 탄압했습니다.
    • 결국 8세의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1614년 사망(사실상 암살)했습니다.
  2. 인목왕후 폐비 사건
    • 광해군은 계축옥사 이후 인목왕후(영창대군의 어머니)를 서궁(창덕궁 후원)으로 유폐하며 왕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 인목왕후는 10여 년간 유폐되었고,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 복권되었습니다.
  3. 서인과 소북파 인사 숙청
    • 광해군은 서인과 소북파 인물들을 반역 혐의로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습니다.
    • 대표적인 희생자로는 유영경, 정준호, 김응남 등이 있습니다.

계축옥사의 결과와 영향

  1. 광해군의 왕권 강화
    • 정적 제거 후 광해군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폭군 이미지가 강해졌습니다.
  2. 인조반정(1623년)으로 복권
    • 1623년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습니다.
    • 영창대군의 명예는 회복되었으며, 인목왕후도 다시 왕대비로 복권되었습니다.

결론

계축옥사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정치 숙청 사건으로, 광해군 집권기 정치적 갈등과 왕위 계승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영창대군의 비극적인 최후와 인목왕후의 유폐, 서인과 소북파의 숙청은 광해군 몰락의 원인이 되었으며, 조선의 정치 지형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