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양국에 막대한 피해를 남기고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종결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10년간 단절되었던 양국의 외교 관계는 1609년 광해군 1년에 체결된 기유약조를 통해 비로소 정상화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조선후기 대일 외교 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으며, 이후 약 260여 년간 지속된 평화적 관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기유약조 체결의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일본의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하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장악하였고, 1603년에는 에도 막부를 수립하여 일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이 임진왜란에 직접 군사를 파병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에도 막부는 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첫째, 새로 수립된 막부 정권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이라는 선진 문물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은 막부의 권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조선의 앞선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 전후 복구와 국가 발전에 활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셋째, 쇄국 정책을 시행하던 에도 막부에게 조선과의 교류는 제한적이나마 대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창구였습니다.
대마도는 이러한 양국 관계의 교량 역할을 자처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적 성격을 지니며 중계무역으로 생존해온 대마도는 전쟁으로 인한 통교 단절로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대마도는 식량 등 생활 필수품을 조선과의 교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교 재개가 절실하였습니다. 이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1599년부터 160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끈질기게 통교를 요청하였습니다.
조선 조정 내에서는 일본과의 국교 재개에 대해 찬성과 반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반대론자들은 임진왜란의 참혹한 피해와 일본에 대한 깊은 적개심을 근거로 교섭 자체를 거부하였습니다. 반면 찬성론자들은 여러 현실적인 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전쟁 중 일본에 끌려간 수많은 피로인(포로)을 송환받아야 한다는 인도적 과제가 있었습니다. 둘째, 국교 단절 상태가 지속되면 왜구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셋째, 북방에서는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하며 후금을 건국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남쪽까지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국가 안보에 부담이 되었습니다. 넷째, 후추와 소목 등 약용품과 무역품의 수입 필요성도 있었습니다.
국교 재개를 위한 조선의 선행 조건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무조건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광해군은 매우 엄격한 세 가지 선행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의의 정식 국서를 보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일본이 임진왜란의 침략 행위를 인정하고 사실상 사죄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상국으로서의 체면과 명분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일본의 진정성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둘째, 임진왜란 중에 조선의 왕릉을 발굴하고 훼손한 범릉적(犯陵賊)을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전쟁 중 일부 일본군이 선릉과 정릉 등을 도굴한 사건은 조선인들에게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며, 이에 대한 명확한 책임 규명과 처벌을 요구한 것입니다.
셋째, 전쟁 중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피로인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약 5만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이들 중에는 도공, 학자,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과의 관계 개선이 절실하였기에 이러한 조건들을 대부분 이행하였습니다. 1604년 조선은 승려 사명대사 유정과 손문욱을 탐적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의사를 확인하였습니다. 사명대사는 교토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담판을 짓고 약 3,000명의 피로인을 데리고 귀국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양국 관계는 급진전되었습니다.
1607년 선조 40년에는 정사 여우길을 중심으로 한 제1차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습니다.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은 일본의 국교 회복 요청에 '회답'한다는 의미와 피로인을 '쇄환'(데려온다)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 사절단의 파견으로 조선과 에도 막부 사이의 국교가 재개되었으며, 2년 후인 1609년에는 구체적인 교역과 외교 관계를 규정하는 기유약조가 체결되었습니다.
기유약조의 구체적 내용
기유약조는 전문 13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대마도주의 세견선 왕래 조건과 조선에서의 접대, 무역 규정 등을 담고 있습니다.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는 왜관에서의 접대 예법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국왕사(일본 국왕의 사신)가 한 예, 대마도주 특송사가 한 예, 대마도 수직인(조선의 관직을 받은 대마도인)이 한 예로 정하였습니다.
제2조는 국왕사가 올 때는 상선(上船)과 부선(副船)만을 허락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제3조는 대마도주에게 매년 지급하는 세사미두(歲賜米豆)를 쌀과 콩을 합하여 총 100석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는 1443년 계해약조에서 정한 200석, 1512년 임신약조에서 정한 100석과 동일한 수준이었습니다.
제4조는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20척으로 제한하였습니다. 이 중 특송선은 3척이며, 이는 세견선 20척에 포함되는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선박의 규모는 대선 6척, 중선과 소선을 각각 7척으로 정하였습니다. 계해약조의 50척, 임신약조의 25척에 비해 더욱 축소된 것입니다.
제5조는 관직을 받은 수직인은 1년에 한 차례씩 조선에 와야 하며, 다른 사람을 대신 파견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습니다. 내조 시 동행하는 반종인(수행원)은 평소와 같이 1인으로 한정하였습니다.
제6조는 배의 크기에 따라 승선 인원을 엄격히 제한하였습니다. 대선은 선부(뱃사람) 40명, 중선은 30명, 소선은 20명으로 정하였습니다. 선체의 크기를 측정하고 선부의 수를 점검하여 정해진 수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제7조는 조선에 들어오는 모든 일본 선박은 반드시 대마도주의 문인(文引)을 소지해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문인은 일종의 여행 증명서이자 통행 허가증으로, 대마도주가 발행하는 공식 문서였습니다.
제8조는 대마도주에게 도서(圖書, 인장)를 만들어 주되, 종이에 견본을 찍어 예조, 교서관, 부산포에 각각 보관하여 서계(외교문서)가 올 때마다 진위를 확인하도록 하였습니다. 격식을 위배하거나 부험(부절과 같은 증표)이 없는 자는 되돌려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제9조는 문인이 없는 자와 부산포 외의 다른 곳에 정박한 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하였습니다. 이는 불법 입국과 밀무역을 엄격히 금지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제10조는 일본 사신이 귀국할 때 지급하는 식량인 과해량을 규정하였습니다. 대마도인은 5일분, 대마도주 특송인은 10일분, 국왕사는 20일분을 지급하였습니다.
제11조는 왜관의 체류 기간을 엄격히 제한하였습니다. 대마도주 특송선은 110일, 일반 세견선은 85일, 표류인 송환 등 기타의 경우는 55일로 정하였습니다.
제12조는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크기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취급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제13조는 조약에 명시되지 않은 기타 사항은 전례에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기유약조와 이전 조약들의 차이점
기유약조는 조선 전기에 체결된 계해약조(1443년)와 임신약조(1512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한 조약이었습니다.
계해약조는 세종 25년에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와 체결한 조약으로, 세견선 50척과 세사미두 200석을 허용하였습니다. 이는 조선 전기 대일 관계의 기본 틀을 마련한 조약이었으며, 대마도주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조건을 제공하였습니다.
임신약조는 중종 7년 삼포왜란(1510년) 이후 다시 국교를 재개하면서 체결한 조약입니다. 왜란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계해약조보다 훨씬 엄격한 조건을 부과하였습니다. 세견선을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하였고, 세사미두도 200석에서 100석으로 줄였습니다. 개항장도 삼포 중 제포 한 곳만 허용하였으며, 왜인의 3포 거주를 금지하였습니다.
기유약조는 임신약조보다도 더욱 제한적인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세견선은 20척(특송선 3척 포함)으로 임신약조의 25척보다 5척이 줄었습니다. 세사미두는 임신약조와 동일한 100석을 유지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대마도에 대조선 무역의 독점권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일본 본토의 여러 세력들도 조선과 교역할 수 있었으나, 기유약조 이후에는 대마도주만이 공식적으로 조선과 통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기유약조는 일본 사신의 한성 상경을 금지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일본 사신이 한양까지 와서 조선 국왕을 접견할 수 있었으나, 전쟁 중 침략로로 활용된 경험 때문에 이후에는 부산포 왜관에서만 접대하도록 제한하였습니다. 한양에 있던 동평관도 폐쇄되었습니다.
문인 제도와 도서 제도를 더욱 엄격하게 운영한 것도 특징입니다. 모든 도항 왜인은 반드시 대마도주의 문인을 소지해야 하며, 서계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도서 견본을 삼중으로 보관하는 등 위조와 불법 입국을 철저히 차단하고자 하였습니다.
기유약조 체결 이후의 변화
기유약조 체결 이후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조선통신사의 정례적 파견이었습니다.
1607년 제1차 회답겸쇄환사를 시작으로, 조선은 1811년까지 약 200년간 총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초기에는 '회답겸쇄환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1636년 제4회부터는 '통신사'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었습니다. '통신'이란 '신의로 통한다'는 의미로, 양국의 우호와 평화를 상징하는 명칭이었습니다.
통신사는 대개 에도 막부의 쇼군이 바뀔 때마다 그 축하를 명목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사절단은 정사, 부사, 종사관의 삼사를 중심으로 의관, 화원, 악사, 역관 등 각 분야의 전문가 300-50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한양에서 부산을 거쳐 쓰시마, 오사카를 지나 에도까지 이르는 여정은 편도만 3-4개월이 소요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일본은 통신사를 국빈으로 대접하며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였습니다. 통신사가 지나는 각 지역의 다이묘(영주)들은 도로를 정비하고, 숙소를 신축하며, 수만 명의 인력과 수만 필의 말을 동원하였습니다. 교토에서 에도까지 53개 역원에서만 총 23만여 명의 인원과 4만여 필의 말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에도 막부가 이처럼 엄청난 비용을 감수하면서 통신사를 요청한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쇄국 정책을 시행하던 에도 막부에게 조선통신사는 막부의 정치적 정통성과 권위를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조선 국왕의 친서와 대형 의장을 앞세운 통신사 행렬이 에도성으로 향하는 모습은 막부의 권력을 상징하는 장관이었습니다.
통신사는 단순한 외교 사절을 넘어 문화 교류의 사절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의 선진 문물과 학문, 예술을 일본에 전파하였으며, 일본의 학자와 문인들은 통신사 일행과의 만남을 학문적 교류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필담창화, 시문 교환, 서화 증정 등 다양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부산포에는 1607년 두모포에 왜관이 재설치되었습니다. 1678년에는 규모가 더 큰 초량 왜관으로 이전하였는데, 그 면적이 약 10만 평에 달하였습니다. 초량 왜관은 약 200년간 조일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습니다.
왜관 무역을 통해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은, 구리, 유황, 후추, 소목 등을 수입하였고, 일본에는 인삼, 쌀, 무명, 서적 등을 수출하였습니다. 대마도는 이러한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기유약조의 역사적 의의
기유약조는 조선후기 대일 관계의 기본 틀을 확립한 역사적 조약이었습니다.
첫째,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적 상처를 극복하고 평화적 관계를 회복한 외교적 성과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적대감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현실적 필요성을 인정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였습니다. 이후 약 260여 년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기유약조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했음을 보여줍니다.
둘째, 조선이 주도권을 가진 조약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약들과 달리, 기유약조는 조선이 더 엄격한 조건을 제시하고 일본이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체결되었습니다. 일본은 국서를 먼저 보내고, 범죄자를 압송하며, 피로인을 송환하는 등 조선의 요구를 이행해야 했습니다. 조약 내용도 일본에 대한 제한과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셋째, 대마도를 매개로 한 간접 외교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기유약조는 대마도에 대조선 외교와 무역의 독점권을 부여함으로써, 조선이 에도 막부와 직접 접촉하지 않고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이 일본을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관리하고자 한 기미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넷째, 문화 교류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기유약조 이후 정례화된 조선통신사는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17년에는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다섯째, 조선후기 대외 관계의 모범을 제시하였습니다. 기유약조는 전쟁 이후 적대국과 평화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원칙과 실리를 동시에 추구한 외교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유약조 체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과 메이지 유신으로 인한 일본의 급격한 변화는 기존 외교 체제를 무력화시켰습니다. 1872년 일본이 왜관을 점령하고 대일본공관으로 개칭하면서 기유약조 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완전히 종료되었습니다.
맺음말
기유약조는 1609년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재개하기 위해 체결된 역사적 조약입니다. 광해군 정부는 피로인 송환, 범죄자 압송, 정식 국서 제출이라는 세 가지 선행 조건을 제시하였고, 일본이 이를 이행함에 따라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전문 13조로 구성된 이 조약은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20척으로 제한하고, 세사미두를 100석으로 정하였으며, 문인 제도와 도서 제도를 통해 입국 왜인을 엄격히 통제하였습니다. 이는 계해약조나 임신약조보다 더욱 제한적인 조건으로, 조선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확보했음을 보여줍니다.
기유약조 이후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이를 통해 약 200년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부산포에 재설치된 왜관은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습니다.
기유약조는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평화를 회복한 외교적 성과이자, 조선이 주도한 대일 관계의 새로운 질서였습니다. 이 조약이 확립한 외교 체제는 조선후기 대외 관계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였으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문화 교류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