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생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예학의 태두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1548년 7월 8일 서울 황화방 정릉동에서 태어나 1631년 8월 3일 충청도 논산 연산에서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그는 동방 18현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되었습니다.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 호는 사계이며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입니다. 그는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기호학파 예학의 거두가 되었으며, 이후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학문을 연마했습니다.
출생과 가문 배경
김장생은 명문가 출신으로 5대조 김국광은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원종공신이 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이 되었으며 좌의정까지 오른 세조의 총신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이고, 아버지 김계휘는 명종대부터 선조초까지 사헌부대사헌을 지냈으며 이이, 박순, 기대승 등 서인계 인사들에게 높은 추임을 받았습니다. 1575년 동서 분당 때 심의겸과 함께 서인으로 지목되었으나 청렴하고 관후한 덕이 있어 크게 동인의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우참찬 신영의 딸 평산신씨이며, 그는 첨지중추부사 조대건의 딸 창녕 조씨와 혼인하여 김은, 김집, 김반 3남과 3녀를 두었습니다.
학문 수업과 성장
김장생은 1560년 12세의 나이로 송익필에게 나아가 사서와 근사록 등을 배우며 학문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송익필은 서출이라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지만 경기도 파주 감악산 자락에 은거하면서 막강한 학문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예학 방면에 뛰어난 조예를 지녔습니다. 1567년 19세의 나이로 율곡 이이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고 조헌, 정엽, 이귀 등 이이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1580년 33세의 나이로는 성혼 문하에도 나아가 수학했습니다. 이로써 김장생은 기호학파의 핵심 학자이자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 역할을 하던 송익필, 이이, 성혼 세 선생에 학파와 정파적 연원을 대게 되었습니다.
김장생의 학문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소학을 학자의 기본으로 삼아 깊이 믿고 힘써 실천하여 종신토록 준칙으로 삼았으며, 매일 밤마다 중용, 대학, 심경, 근사록 등의 책을 외우되 돌려가면서 충분하게 읽어 마치 자기의 말을 외우듯이 했다고 전합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재질이 노둔하여 성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이와 같이 힘쓰기를 꾸준히 함에 미쳐서는 모든 이치가 환하게 풀렸다는 내용을 통해 그가 노력형의 학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며 화기가 애애하였으나 일의 시비를 논하고 사람의 선악을 분변할 때는 엄정한 말과 낯빛으로 굽히거나 흔들림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관직 생활과 임진왜란
김장생은 1578년 30세의 나이로 이조판서 이후백의 천거를 받아 창릉참봉을 제수받으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581년 종계변무의 일로 명나라에 사행을 가는 아버지를 수행하여 중국에 다녀온 뒤 돈녕부참봉이 되었습니다. 이후 순릉참봉, 평시서봉사를 거쳐 활인서, 사포서, 사옹원 등의 별제와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 동몽교관, 인의를 거쳐 1591년 정산현감이 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로 승진했습니다. 1596년 한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 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 익위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습니다. 1600년 유성룡의 천거로 종친부전부가 되었고, 1602년 청백리에 뽑혔으며 이듬해 익산군수로 나갔습니다. 김장생은 선조초부터 광해군초까지 약 30여 년간 천거를 통해 비중이 낮은 경외의 여러 관직을 지냈지만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고, 이는 1599년 그가 필생의 역작인 가례집람을 내고 있었던 점에서 확인됩니다.
계축옥사와 은거 생활
1605년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내려갔으며, 그 뒤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 회양부사, 철원부사를 역임했습니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 김경손, 김평손 등이 옥사에 연루되어 역률로 처단됨에 따라 김장생도 화를 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광해군 즉위 후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 간의 암투가 심각했는데, 대북파는 영창대군과 소북파의 제거를 획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장생의 서제들이 연루되었으나 유사가 법제상 연좌시킬 수 없다고 하였고 대신의 건의가 있어 일이 거기서 그쳤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소극적인 벼슬살이마저 청산하고 연산으로 낙향하여 두문불출하게 되는데 1623년 인조반정까지 10여 년간을 다시 학문에 몰두했습니다. 이 사이에도 서인 내에서의 그의 명망은 더욱 높아만 갔으며, 이후 인목대비 폐모 논의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는 속에서 더 이상의 관직을 포기하고 예학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습니다. 광해군대 대북파는 계축옥사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사림세력의 지지 기반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서인과 남인 세력은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인조반정과 산림의 활약
인조반정 후 김장생은 75세의 고령이었지만 서인세력의 상징적 존재인 산림으로서 정국에 재등장했습니다. 인조는 반정이 성공하자 김장생을 사헌부장령으로 소환했으며, 특히 성균관에 사업이라는 직책을 새롭게 만들어 김장생, 장현광, 박지계 3인을 임명하고 김장생으로 하여금 통솔하도록 했습니다. 1624년 반정후의 논공행상 과정상의 문제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76세의 노구로 공주로 파천한 국왕을 나아가 맞이했습니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했으며, 이후 공조참의가 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했습니다. 162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한 뒤 이이와 성혼을 제향하는 황산서원을 세웠고, 같은 해 스승 송익필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80세의 노구로 양호호소사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피난 온 세자를 호위했습니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했습니다.
예학의 집대성
김장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발달한 예학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예학은 15세기 말 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유교적 이념의 실천이 강조되면서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 예학이 더욱 성행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 질서가 흔들리면서 국가적으로 이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리학의 이기론을 바탕으로 심성론이 발달하게 되었고, 심성론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심성론에 기반한 사회윤리론인 예학의 발달을 유도하게 되었습니다.
김장생은 학문적인 관점에서 예를 시행해야 하는 명분과 그 철학적 근원을 정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예를 실천하기 전에 심신의 수양을 통해 온전한 심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예를 실천하는 데에는 반드시 성의가 있어야 하며 성의가 없는 예는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예학의 귀결을 통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정통으로 보았는데,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는 그 나름의 기강과 질서가 필요하고 그 근간이 통이며 이러한 통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예라는 것입니다. 김장생은 안정된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한 보편적인 질서를 사대부 예법의 기준인 주자가례에서 찾았고, 그것을 여타의 예법에 똑같이 적용했습니다.
그가 편찬한 최초의 예서는 1583년에 나온 상례비요로서 이는 앞선 시기 신의경이 편집한 상례서를 보완하고 절충한 것이었습니다. 이어 1599년 52세에 그의 필생의 역작인 가례집람을 내었는데, 여기서는 성리예학의 대표서인 주자의 가례를 미완의 책자로 간주하고 여러 학설을 모아 조목별로 해석하여 보충했습니다. 곧 김장생은 가례의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인정하고 조선사회의 현실에 적합한 새로운 예론을 정립하는데 목적을 두고 주자예학을 연구했던 것입니다. 상례비요나 가례집람 이외에 그가 문인들 사이에 주고 받은 예설은 별도로 모아져 그가 사망한 이후 1646년 의례문해라는 이름의 예서로 송시열과 송준길 등 문인들에 의해 간행되었습니다.
왕실 예학과 정원군 추숭 논쟁
김장생은 처음 사대부들의 예학, 곧 사례를 주로 연구했으나 점차 서인의 산림학자로서 위상이 높아지면서 왕실의 예학, 곧 왕례의 연구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조반정후 인조의 사친인 정원군의 처우 문제에 대한 예설입니다. 1624년 인조는 김장생에게 사친 정원군에 대한 제사 축문의 문제를 자문했습니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왕자인 정원군의 아들로서 선조의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백부가 되는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니 할아버지 선조의 대통을 이은 셈이었습니다.
인조는 반정후 정원군의 가묘에서 반정사실을 고묘하면서 축문에 정원군을 아버지로 호칭하고자 했습니다. 산림 박지계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경우 생부를 아버지라 불러도 된다고 하여 인조의 내심에 호응했고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박지계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반면 김장생은 인조는 선조의 손자지만 입승대통했으므로 선조를 아버지로 불러야 하고 사친인 정원군은 백숙부로 불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인조는 자신의 뜻대로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봉해서 아버지로 삼았으며 급기야는 1632년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고 1635년에는 원종을 종묘에 부묘하여 선조-원종-인조로의 계통을 확립했습니다. 김장생은 인조의 노여움을 사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설을 고집했고 이로 인해 인조는 김장생의 사후 그에게 시호를 내리자는 장유의 요청을 굳이 거부했다고 전해집니다.
주요 저서와 학문적 업적
김장생의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4권을 비롯하여 가례집람, 전례문답, 의례문해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 경서변의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합니다. 그는 경학과 예학을 함께 병행하는 학문적 태도를 보였으며, 경학 방면에서는 소학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그 가르침을 종신토록 준칙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하여 발문을 달기도 했습니다.
그가 학문을 가르치는 순서는 처음에는 소학과 가례를, 다음에는 심경과 근사록을 가르쳐 배우는 자들의 학문의 근본을 배양하게 하고 학문의 길을 열어 준 다음에 비로소 사서와 오경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차서가 분명하고 단계가 매우 엄격했습니다. 이처럼 그가 학문의 처음에 소학과 가례로써 시작했던 점은 그가 경학과 예학을 하나로 보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의 경학 방면의 연구는 1598년 51세 때의 근사록석의, 1618년 71세 때에 경서변의가 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예학에 있었고 저서도 예서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제자 양성과 문하의 발전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강석기, 장유, 정홍명, 최명룡, 김경여, 이후원, 조익, 이시직, 윤순거, 이목, 윤원거, 최명길, 이상형, 송시영, 송국택, 이덕수, 이경직, 임의백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했습니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으로,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은 가학을 이어받아 부친의 예학을 완성하고 부친의 사후에 그 제자들까지 계승했습니다.
제자 송시열은 스승의 서인 산림으로서의 정통성을 계승하여 이후 효종부터 숙종대까지 서인 정파의 학문적, 정치적 구심이 되었습니다. 특히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서인내 노론과 소론의 분기가 일어나면서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가 되는데 이로써 김장생 또한 서인-노론계 산림으로 비정되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습니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습니다.
사후 추숭과 역사적 평가
1631년 김장생은 84세의 고령으로 연산에서 사망하여 연산 진금면 성북리에 안장되었다가 1641년 다시 고정리로 이장되었습니다. 당시 김장생의 위상은 장유가 신도비명을, 송시열이 행장을, 송준길이 시장을 지었다는 점, 또 그의 상에 1천여 명이 모여들었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1657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원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1687년 왕명으로 방대한 분량의 문집 사계전서가 간행되었습니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1717년 노론이 집권하면서 문묘에 종향되었는데 당시 김장생의 문묘 종향은 노론의 정치적 학문적 승리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김장생은 연산의 돈암서원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그는 관직에 연연해하지 않고 학문을 우선하여 끊임없는 학문적 연찬과 후학 양성에 주력했으며, 그 결과 광해군부터 인조대까지 서인을 상징하는 산림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조선후기 사상계와 정계에서 산림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는데, 이들은 급제나 관직 여부와 상관없이 뛰어난 학문적 업적과 문하에 양성한 수많은 제자들을 통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예학 사상의 특징과 의의
김장생의 예학은 예의 본질에는 변치 않는 덕목이 있는 반면, 예의 형식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했습니다. 또 예의 가치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 있으며,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다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예학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 이후 혼란해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통을 바르게 하는 것, 즉 정통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정통주의적 예학론은 이후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장생의 예학은 사대부가의 예학에서 시작하여 왕실의 예학까지도 두루 포괄한 것으로 조선 예학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성리예학의 기본서인 가례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대 전례를 방대하게 참고하여 조선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예학을 도출해 내었습니다. 그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비판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적극 옹호했으며, 같은 선상에서 조선 도학의 연원에 대해서도 조광조 이래 퇴계 선생이 나와 사문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고 후학에 길을 열은 공로는 크지만 성인의 종지를 얻어 도맥을 이은 이는 오직 율곡 선생 한 분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김장생은 우월한 가문적 배경에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송익필과 이이에게 배웠으며 무엇보다도 스승들이 수제자로 허여할 정도의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기호학파 송익필과 이이의 적통을 계승한 서인계 사림학자로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성리예학을 기반으로 당시 조선사회의 시의성을 반영한 조선예학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됩니다. 이러한 학문적 업적에 기반하여 서인계 산림의 지위에 올라 조선후기 서인-노론 학맥의 중추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 김장생의 위상
김장생은 학문적으로 송익필, 이이, 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는데, 하지만 예학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송사련의 일로 환천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 정엽 등과 신변사원소를 올렸습니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천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습니다.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습니다.
김장생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정국에 재등장하여 1631년 사망할 때까지 약 십여 년간 서인의 상징적 존재인 산림으로서 국가의 끊임없는 부름과 예우를 받는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실제로도 그는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 그의 가장 큰 힘은 그의 둘째 아들인 김집을 위시하여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강석기, 장유, 최명길 같은 유명한 제자들로서 이들이 있었기에 정계와 학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