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촌의 마지막 순간과 사망 소식
2013년 1월 5일 오전 0시 42분, 1970~1980년대 한국 조직폭력계를 평정했던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이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향년 64세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사망이 아닌,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이면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의 마지막이었다.
김태촌은 2010년 12월 갑상샘 치료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후, 2012년 3월부터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서울대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3월부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중환자실에 계속 입원해 있다가 오늘 새벽 숨졌다"고 밝혔으며, 사망원인은 급성 패혈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전해졌다.
김태촌의 생애: 전라남도 담양에서 전국구 두목까지
초기 생애와 조직폭력계 입문
김태촌(본명: 김태촌, 1948년 10월 10일~2013년 1월 5일)은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광주 서방면에서 자라났으며, 17세에 처음 구속되어 20세가 될 때까지 소년원을 세 차례 들락거렸다. 어린 나이에 비해 수형 기간이 길어 병역은 면제되었다.
1975년 전남 광주 폭력조직인 서방파의 행동대장을 시작으로 조직폭력계에 발을 들인 김태촌은 1977년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군소 조직들을 제압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976년에는 정치깡패로도 활약했는데, 이철승 당시 국회의원의 명령으로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주도하며 김영삼 당시 신민당 신임 대표를 습격하기도 했다.
범서방파의 결성과 전성기
김태촌이 이끄는 범서방파는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와 함께 1980년대 전국 3대 폭력조직으로 꼽혔다. 1989년 경기 파주에서 열린 '축복기도대성회'라는 종교행사는 실제로는 300여 명이 참석한 범서방파 결성식이었다. 검찰은 이 행사를 범서방파의 공식적인 출범으로 판단했다.
범서방파는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함평서방파', '충장오비파', '방배서방파' 등 산하 조직을 두었고, 김태촌은 이들을 부두목급에게 맡겨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뉴송도호텔 사건: 김태촌을 전국구로 만든 사건
사건의 전말
김태촌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1987년 인천 뉴송도호텔 나이트클럽 사장 황모씨 살인교사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김태촌은 부하들을 시켜 호텔 나이트클럽 사장을 흉기로 난자하도록 지시했으며, 당시 검찰이 김태촌에게 1심과 2심 재판 모두에서 사형을 구형할 정도로 잔혹한 범행이었다.
법정 처벌과 수감 생활
김태촌은 이 사건으로 징역 5년과 보호감호 7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1989년 폐암 진단을 받아 형 집행정지로 일시 석방되었으나, 1992년 범서방파 결성 혐의로 다시 구속되어 징역 10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결국 김태촌의 총 형량은 16년 6개월과 보호감호 7년으로 늘어났다.
옥중결혼과 이영숙과의 인연
운명적인 만남
김태촌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는 1998년 가수 이영숙과의 옥중결혼이었다. 이영숙은 '아카시아의 이별'(1968), '그림자'(1969), '가을이 오기 전에'(1969) 등의 히트곡으로 1960~1970년대 큰 인기를 누린 가수였다.
이영숙은 교회에서 목사의 소개로 김태촌을 알게 되었으며, 3년간의 서신 교환을 통해 사랑이 싹텄다. 당시 이영숙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3년 동안 서신 왕래를 했다지만 30년 살아온 사람보다 더 서로를 많이 안다. 거짓없이 서신을 주고 받았다"며 진실된 마음을 전했다.
부부로서의 삶
1999년 옥중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김태촌의 출소 후에도 함께 생활했다. 이영숙은 김태촌을 만난 후 더욱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했으며, 사단법인 '한국 은빛소망회'를 운영하고 2008년 자전적 신앙간증서 '나도 살아요'를 출간하기도 했다. 김태촌이 2013년 사망한 후 3년 만인 2016년 11월 17일, 이영숙도 자궁경부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출소 후의 변화: 신앙인으로서의 삶
교회 집사로서의 활동
2004년 10월 출소한 김태촌은 2005년 7월 사회보호법 폐지와 함께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그는 인천의 한 교회에서 집사로 활동하며 소년원, 경찰서, 교도소 등을 찾아 설교와 신앙 간증을 해왔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도 활동했으며, 각종 기독교 행사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는 간증을 했다.
김태촌은 한 강연에서 "청송교도소 수감 시절 아내가 유산했다는 소식에 자살을 기도했는데, 반평짜리 독방 마룻바닥을 헤매던 나를 일깨운 것이 바로 성경책이었다"며 창세기를 외워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지속된 논란과 법적 문제
하지만 김태촌의 개과천선은 완전하지 않았다. 2006년 수감 당시 교도소 간부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가 적발되어 일본에서 귀국하던 길에 다시 구속되었다. 2007년에는 배우 권상우에게 일본 팬미팅 행사를 강요하는 협박 전화를 건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권상우 협박 사건의 전말
사건 발생 배경
2006년 4월, 김태촌은 종교활동 중 알게 된 일본인 친구로부터 "권상우가 시계를 받고도 팬미팅 공연을 해주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권상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통화는 단순한 설득이 아닌 명백한 협박의 성격을 띠었다.
협박 내용의 구체적 전말
김태촌은 권상우의 지인이 휴대전화를 대신 받자 "나 김태촌인데... 권상우가 일본에서 시계를 받고도 공연을 해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권상우를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이어 "권상우 집이 ○빌라 OOO호 맞지? 안 만나주면 집으로 간다. 내일부터 (집이) 피XX가 돼도 상관없느냐"고 위협했다.
권상우와 직접 통화에서도 김태촌은 "내가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는데, 애들이 얘기를 안했나 보지?"라며 협박조로 말을 이어갔다. 권상우가 거절하자 "이렇게 얘기하는데도 나를 안 만난다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도 괜찮다는 거지?"라고 재차 위협했다.
사망 후 장례식과 사회적 반응
빈소에 몰린 조문객들
김태촌의 빈소는 유족의 요청에 따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이틀간 1,500여 명의 조문객이 몰려들었으며, 각계 유명인사들과 지인들이 보낸 화환이 100여 개나 빼곡히 들어섰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가수 설운도, WBC 세계챔피언 엄동균, 강동희 동부프로미 감독 등 종교인과 체육인들의 화환이 주를 이뤘다.
야구 해설가 하일성과 중견배우 임혁 등은 장례식장을 직접 찾아 조의를 표했으며, 인터넷에서 '조폭'이라고 검색하면 이름이 나오는 사람들은 다 왔다고 할 정도로 주먹계 인사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경찰의 대규모 경비 작전
경찰은 김태촌의 장례 기간 동안 서울 빈소뿐만 아니라 광주와 담양까지 대규모 경찰력을 배치했다. 발인날인 8일까지 150여 명의 경찰 병력이 병원 주변에서 경계 근무를 섰으며, 전남지방경찰청도 광역수사대 경찰관 20여 명을 경비인력으로 투입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폭력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고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마지막 여행: 고향으로의 귀환
2013년 1월 8일 오전 6시 장례식이 치러진 후, 김태촌의 시신은 오전 11시께 전라남도 광주로 옮겨졌다. 영정사진을 태운 운구차량 뒤로는 대형버스 10여 대와 검정색 승용차량 20여 대, 총 300여 명이 뒤따랐다. 유족 및 관계자들은 그의 옛집 앞에서 5분여간 예배를 드리는 노제를 마친 후, 십자가가 새겨진 하얀 천을 두른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고향인 전남 담양군 무정면의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범서방파의 몰락과 조직의 와해
김태촌 사망 이후 조직의 변화
김태촌의 사망은 범서방파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나모(50)씨가 2013년 2월 호남 최대조직 '국제PJ파' 부두목에 의해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이는 조직 간 세력 다툼이 아닌 개인적 금전 문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마지막 세력 확장 시도와 실패
범서방파는 2009년 김태촌의 출소에 맞춰 '함평식구파' 31명을 흡수하며 세력을 불리려 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칠성파 조직원 80여 명과 회칼, 야구방망이 등 흉기를 이용한 대규모 패싸움을 계획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조직의 완전한 와해
2014년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범서방파 부두목 김모(47)씨 등 8명을 구속하고 53명을 불구속 입건하는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이로써 범서방파 간부급이 모조리 철창 신세를 지게 되면서 조직이 구심점을 완전히 잃었다. 2016년에는 범서방파 고문 나씨까지 구속되면서 전통적 의미의 폭력조직으로서 범서방파의 몰락이 상징적으로 확정되었다.
김태촌 사망의 사회적 의미와 여파
조직폭력계 지형 변화
김태촌의 죽음은 한국 조직폭력계의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70~80년대 3대 패밀리 시대를 이끌었던 김태촌, 조양은, 이동재 중 이동재는 이미 1988년 양은이파의 보복으로 불구가 된 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김태촌의 사망으로 사실상 전통적인 대형 조직폭력단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언론과 수사기관의 관심
김태촌의 죽음이 뉴스가 된 이유는 일반적인 부고와는 달랐다. SBS의 분석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이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할 뉴스가 아니라, 경찰이 빈소 주변 경계를 강화해야 할 만큼 사회적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다. 이는 김태촌이 우리 공동체와 이웃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다.
범죄조직의 변화 양상
김태촌 사망 이후 조직폭력배들의 활동 영역이 다양화되고 개인 사업 중심으로 변화했다. 재건축 등 이권 사업 투자, 증권 투자, 연예 매니지먼트 사업 등 대외적으로 합법적인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과거와 같은 대규모 조직 차원의 패싸움이나 연장 사용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결론: 시대의 마감과 역사적 교훈
김태촌의 사망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대표하는 시대의 종료를 의미했다. 1970~80년대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권력과 폭력이 결합했던 시기의 산물인 그의 인생은, 개인의 선택이 사회 구조와 만날 때 어떤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의 말년의 신앙 생활과 사회 봉사 활동은 진정한 회개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생존 전략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을 남겼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김태촌이라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폭력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과, 진정한 변화의 어려움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3년 1월 5일 새벽,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김태촌. 그의 죽음과 함께 한국 조직폭력사의 한 장이 완전히 넘어갔고, 이제 그는 역사 속 인물로만 기억되고 있다. 그가 남긴 것은 화려했던 악명과 함께, 폭력으로는 결코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