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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마츠 마사야스 : 乘松雅休,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선교사의 삶과 헌신

by NewWinds 2025. 6. 20.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조선인들에게 일본인이라는 것은 곧 침략자와 가해자를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도 조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답게 살았던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리마츠 마사야스(乘松雅休, 1863~1921)입니다. 그는 일본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서, 수원을 중심으로 18년간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조선총독부의 무력통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3.1운동을 지지했던 용기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무라이 집안 출신에서 선교사로의 전환

초기 생애와 신앙의 시작

노리마츠 마사야스는 1863년 일본 시코쿠(四國) 북서부의 사무라이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원래 그는 가나가와 현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며 평범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기독교와의 만남으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노리마츠는 일본 최초 개신교회인 요코하마카이간교회에서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후 메이지대학 신학부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메이지대학 신학부 재학 중에는 영국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 소속 선교사 H.G. 브랜드(Brand)의 영향을 받아 플리머스 형제교회로 이적하고 신학부를 중퇴하게 됩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조선 선교 결심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피살되는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노리마츠는 일본인으로서 큰 충격과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일본인인 자신이 대신 속죄하고, 종교적 사랑을 통해 조선의 아픔을 치유하겠다는 숭고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1896년 12월 23일, 노리마츠는 인천항에 도착하여 조선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일본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 선교 사례로 기록됩니다. 그의 조선행은 단순한 선교활동을 넘어서, 일본인으로서의 참회와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의 초기 선교활동과 시련

한글 학습과 노방전도의 시작

인천에서 말을 타고 서울로 향하던 노리마츠가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면서 하늘을 가리키며 몇 번이고 "하나님, 하나님"하고 외치자, 마부가 하나님을 믿으라는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첫 신자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는 그의 순수한 신앙과 열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노리마츠는 한 여인숙에서 주인의 도움으로 청년 조덕성을 소개받고, 1897년 1월부터 한글을 배우며 노방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조덕성과 함께 1904년에는 '성서 증언'이라는 문서를 발간하여 문서 선교에도 힘썼습니다. 이 잡지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기독교의 진리를 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의 적대감과 시련

하지만 일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노리마츠에게 돌팔매질을 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도 조선 아이들에게 맞아서 울며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선교범위를 넓혀 경기도 장호원까지 가서 전도할 때는 재워주는 집이 없어 시골집 굴뚝을 껴안고 잠을 청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노리마츠는 조선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에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한복을 입고 한옥에서 조선식으로 생활하면서 아들에게도 조선말을 가르치는 등, 조선인처럼 살았습니다.

수원 정착과 본격적인 선교사역

수원 이주와 성서강론소 설립

1898년 브랜드 부부가 내한하여 서울지역을 맡자, 노리마츠는 1900년 8월 9일 수원 장안동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수원 출신 성도 한 사람이 수원에 복음을 전해 줄 것을 청하면서 이루어진 이주였습니다. 4개월 된 아들 요시노부를 안고 걸어서 수원으로 이사한 노리마츠는 개항기 수원에 정착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습니다.

 

1900년 9월, 노리마츠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장안동 자택을 '성서강론소'로 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수원 정착 한 달도 안 된 9월 1일, 서문 밖 서호에 쉬러 갔을 때 한 무리의 부인들이 항미정에서 떡 등을 주었고, 노리마츠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노인 이창민씨가 신앙을 고백하고 정자 아래 폭포수 밑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수원에서의 첫 열매였습니다.

수원 성서강당 건립과 기독동신회 설립

1909년 8월, 김태정이 수원천변 토지를 기부하고 신자들의 헌금과 협력으로 한옥의 집회소를 지어 '수원 성서강당'이라 했습니다. 1917년에는 일제 당국의 요청에 따라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로 종교단체 등록을 하여 훗날 수원동신교회가 되었습니다.

 

기독동신회는 기존의 기독교 교회들이 순수한 신앙에서 벗어났다고 보고 성서에 근거한 순수 신앙의 회복을 목표로 설립되었습니다. 플리머스 형제단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이 공동체는 제도교회와는 매우 다른 신앙노선을 보여주었습니다.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변치 않은 사랑

머리카락을 판 아내의 헌신

노리마츠는 극도로 가난했지만 조선인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왔을 때 "점심식사를 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에 청년이 먹지 못했다고 하자, 노리마츠는 즉시 아내를 불러서 "빨리 점심을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쌀독에 쌀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사토는 머리카락을 잘라 시장에 내다 팔아 양식을 구해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머리카락에 대한 당시 일본 여성의 의식을 고려할 때, 자신의 생명에 버금가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던 머리카락을 잘라 판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한동안 그의 아내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다녀야 했습니다.

아내의 죽음과 홀로서는 고독

결국 가난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그의 아내 사토는 1907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두 자녀와 남편을 남겨둔 채 조선 땅에서 하나님의 품에 먼저 안겼습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사토 여사는 폐렴으로 사망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노리마츠는 선교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수원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충청북도 등 38개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등 열정적으로 사역을 펼쳤습니다. 수원 동신교회를 비롯하여 장호원과 안성에도 교회를 설립했고, 경북 경주, 충북 음성 등지에서 400명의 신도를 얻었습니다.

3.1운동과 일제에 맞선 용기

"피를 흘린 죄"라는 제목의 저항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노리마츠는 일본의 '복음시보'라는 신문에 "피를 흘린 죄"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 글에서 그는 일본 사이토 총독을 겨냥해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의 의거를 소개하며 무력을 앞세운 통치에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썼습니다.

 

아울러 성경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형제의 생명을 끊으면 망한다,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스스로 피를 흘리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의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칼을 칼집에 꽂아라"는 기록을 인용하면서 총독부에 항의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와의 대립

노리마츠는 총독부의 무력통치에 대립각을 세우다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일제가 조선인을 핍박하고 학대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3.1 만세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한 조선총독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는 병든 몸으로 수원에 다시 와서 3.1운동을 높이 평가하며 조선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마지막 여정과 조선에 묻힌 유골

일본으로의 귀국과 요양

노리마츠는 열정적인 사역으로 건강이 날로 쇠약해져서 결국 1914년 고향인 오다하라(小田原)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건강을 회복하고 3차례나 수원교회를 방문하여 말씀을 전했지만, 다시 병이 악화되어 1921년 2월 12일 일본에서 결핵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조선에 뼈를 묻어달라는 유언

노리마츠는 임종 전에 "조선에 뼈를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1922년 동신회 수원교회 성도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오다하라까지 찾아가서 유골을 가져왔습니다. 화장한 그의 유해는 노리마츠의 유언에 따라 사토 여사의 묘가 있는 수원 광교산에 묻혔다가, 현재의 수원동신교회 경내로 이장하여 영면에 들었습니다.

 

수원교회 뜰에는 그의 무덤과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시작도 사람을 위해 그 생애 충애(忠愛)뿐, 몸소 사랑을 띠고 그 모든 소유를 버리고, 부부 한마음으로 복음을 한국에 전하였노라"

수원 지역에서의 성자로 기억되는 모습

"승송 목사"에서 "성자"로

수원 지역에서 노리마츠 마사야스는 승송(乘松) 목사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목사나 선교사라는 호칭을 넘어서 "성자"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는 의미였습니다.

 

노리마츠의 장례식에서 수원 동신교회의 김태희는 추도의 글을 통해 그의 헌신과 사랑을 이렇게 기념했습니다: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을 증오합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일본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 노리마츠의 일본은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영향

기독동신회와 플리머스 형제단 교회가 지금도 경기 남부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는 노리마츠가 동신교회에 뿌리를 내리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1919년 당시 교회의 수는 38개였으며, 광복 이후 전국 각지에서 모임이 활성화되면서 교세가 증가했습니다.

 

현재 서울 지역의 모임은 1977년 '기독동신회 서울중앙교회'라는 이름을 내걸었고, 수원 지역의 모임은 1979년 '수원동신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각 지역별로 신앙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매년 여름 수련회를 통해 전국의 교인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현대에 재조명되는 노리마츠의 의미

영화 "무명"을 통한 재발견

2025년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노리마츠 마사야스의 삶이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배우 하정우가 내레이션을 맡은 이 영화는 일제 강점기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과 신념을 내던진 무명의 일본인 선교사들을 집중 조명합니다.

 

영화는 CGN이 제작했으며, 6월 25일 전국 롯데시네마에서 개봉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노리마츠 마사야스와 신사참배 반대로 추방된 오다 나라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일 관계의 새로운 관점 제시

노리마츠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신앙 이야기를 넘어서, 한일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에도 국가와 민족을 넘어선 사랑과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도 일제의 식민정책이나 문화 침략과는 거리를 두고 한국인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120여 년 전 수원천변에 살았던 조선을 사랑했고 스스로 조선인이 되고자 했던 일본인 목사 부부의 이야기는, 비록 태생은 일본인이었지만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으로 살며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비인간적인 식민통치에 반대하고,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것을 이웃과 나누는 종교적 사랑을 실천한 아름다운 사연입니다.

맺음말: 시대를 초월한 사랑의 메시지

노리마츠 마사야스의 삶은 한 개인의 신앙 여정을 넘어서,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민족 간의 화해를 추구한 숭고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인으로 태어났지만 조선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겼고, 조선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라는 비극적 사건에서 시작된 그의 조선 사랑은, 18년간의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통해 수많은 생명들에게 희망을 전했습니다.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변치 않은 사랑을 보여준 그의 삶은, 물질적 풍요보다 영적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3.1운동을 지지하고 일제의 무력통치를 비판한 그의 용기는, 신앙인으로서의 올바른 가치관과 정의감을 보여줍니다. 그는 같은 일본인이었지만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조선에 뼈를 묻어달라"는 그의 마지막 유언은, 조선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현재도 수원 동신교회에 잠들어 있는 그의 무덤은 한일 양국민에게 화해와 상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노리마츠 마사야스의 삶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줍니다. 국경과 민족을 넘어선 사랑, 자신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희생정신, 불의에 맞서는 용기,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신념 등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귀중한 가르침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