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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 거열형 : 조선시대 대역죄인에게 집행된 극형 중 가장 잔혹한 사형 집행 방법

by NewWinds 2025. 10. 26.

능지처참과 거열형의 의미

조선시대 사극을 시청하다 보면 "저놈을 당장 능지처참에 처하라"는 대사를 종종 듣게 됩니다. 이 대사가 의미하는 것은 사형 방법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극형을 뜻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능지처참과 거열형을 같은 형벌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엄연히 다른 형벌입니다.

능지처참(凌遲處斬)은 정확히는 능지처사(凌遲處死)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는 표현입니다. 능지(凌遲)의 원래 뜻은 산이나 구릉의 완만한 경사를 말하는데, 이는 가능한 한 느린 속도로 고통을 극대화하면서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 거열형(車裂刑)은 죄인의 목과 팔다리를 수레나 소, 말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형벌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시대에는 능지처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실제 집행은 중국과 달리 거열형으로 대체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두 형벌이 혼용되어 사용되면서 오늘날까지 혼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능지형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능지형은 고대 중국에서 청대까지 시행되었던 사형 방법 중 하나로, 사형 중에서도 반역 등 일급의 중죄인에게 실시하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습니다. 이 형벌은 중국 요나라 때 처음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며, 송나라 시대에는 과형(剮刑)으로 불렸습니다.

송나라 시대에는 천도만과(千刀萬剮)라는 사자성어로도 불렸는데, 이는 천 번 살을 베어내고 만 번 뼈와 살을 발라낸다는 뜻입니다. 속칭으로는 살천도(殺千刀)라고도 했는데, 천 번 칼질하여 죽인다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실제로 죄인에게 6천 번까지 난도질을 가한 기록이 있습니다.

명나라 시대에는 능지형이 가장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환관 유근(劉瑾)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려다 체포되어 3일에 걸쳐 하루 평균 2,000회의 칼질을 받아 도합 6,000번의 칼질이 가해져 당대 최고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유근의 모함으로 능지를 당했던 진사 정만(鄭曼)이 3,600번이나 되는 칼질을 당했으나 가슴을 도끼로 부수기 전까지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능지형의 집행 방법은 매우 정교했습니다. 정확한 방법은 죄인이 발버둥쳐서 살을 포 뜨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죄인에게 일단 아편을 먹여서 정신이 멍한 상태로 만들어 놓은 후 작은 칼로 죄인의 살을 최대한 작게 계속해서 포를 떠서 잘라내는 형벌입니다. 보통 과다출혈이나 쇼크사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형을 끝까지 집행하기 위해서 혈관을 피해서 살점만 도려내는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송나라 시대의 방법을 보면, 죄인을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어 고정시킨 후, 팔이나 다리 등 사지를 손가락 발가락 끝부터 조금씩 시간을 두고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후에 다시 조금씩 잘라냈습니다. 팔다리의 사지를 잘라낸 후에는 동체를 덜 치명적인 부분부터 잘라내기 시작하여 죄인이 죽음에 이르면 나머지 부분을 토막냈습니다.

거열형의 특징과 집행 과정

거열형(車裂刑)은 중국의 전국시대 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변법과 개혁으로 유명한 진나라 재상인 상앙이 개발했다고 전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상앙 자신도 훗날 거열형에 처해졌습니다.

거열형의 집행 방법은 목과 사지를 밧줄에 묶어 소나 말의 힘으로 각각 반대 방향으로 당겨 찢어 죽이는 방법입니다. 이름에 수레 거(車)가 들어가는 이유는 밧줄을 소의 몸에 묶은 모습이 우마차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사극 등에서는 이를 오해하여 실제 수레가 형 집행에 동원되는 연출이 나오기도 합니다.

한나라 때 나온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이 형벌을 뜻하는 '환(轘)'이라는 글자를 찾아보면, "환이란 사람을 수레로 찢어죽이는 것[車裂人也]"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한나라 이전부터 거열형이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열형은 5마리의 소를 이용해 당기기에 오우분시(五牛分屍)라고도 하고, 몸이 5조각이 나므로 오체분시라고도 불렸습니다. 집행 방법 특성상 사지와 머리가 찢어지는 형태로, 잘 찢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망나니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칼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능지처참과 거열형의 본질적 차이

능지처참과 거열형은 엄연히 다른 형벌입니다. 능지처참은 산 채로 살을 회 뜨듯이 처형하는 방식인 반면, 거열형은 사지를 밧줄로 묶어 찢어 죽이는 방식입니다.

원래 능지처참이라는 말은 능지형과 참형을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말이나 소에 사지를 묶어 오체분시하게 하는 사형법은 거열형이라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능지처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거열형으로 집행했습니다. 이는 능지형이 너무 잔인하다 하여 판결은 능지형으로 나와도 참형이나 거열형으로 대체하여 집행했기 때문입니다. 태종 7년(1407년) 실록에 의하면, 태종과 황희의 대화에서 "이전에는 거열로 능지를 대신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에서는 거열형으로 능지를 대체한 것이 확인됩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본래의 방식으로 거열형을 집행하는 예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 참형에 처한 뒤 그 시신의 사지를 거열형에 처한 것처럼 사후에 절단하는 형태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공포 각인이라는 목적은 달성하면서도 집행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능지처사형의 적용과 집행

조선시대의 경우 중국의 『대명률』을 수용하여 능지처사형을 시행했지만, 집행 방식은 거열형으로 하였습니다. 1397년(태조 6) 반포한 『경제육전』 형전에 강상죄는 능지나 거열 같은 중형을 시행하고 그 시체를 토막내 돌린다는 의미의 전형회시(典刑回示)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는 것을 보면, 거열형은 이미 조선 초부터 법제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명률』의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목을 보면, 우선 역모를 꾀하거나 종묘, 왕릉, 궁궐을 훼손한 경우인 모반·대역죄인이 있습니다. 모의만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주모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관계없이 모두 능지처사로 처단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조부모, 부모, 외조부모를 살해하거나, 남편, 혹은 남편의 부모, 조부모를 살해한 자, 주인을 살해한 노비 등 강상죄에 해당하는 폐륜 살인을 저지른 자도 능지처사로 다스렸습니다. 일가족 3명을 살해하거나, 사람의 신체를 절단하여 살해한 자, 외간 남자와 짜고 본 남편을 살해한 처·첩도 능지처사의 형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거열형의 집행 장소는 주로 한양 도성 안의 군기시(병기 제조를 맡은 관청), 저자거리, 무교(지금의 무교동) 등에서 행해졌습니다. 이 형벌이 가장 많이 행해진 장소는 지금의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군기시 앞길이었습니다. 한양 도성의 중심에서 참혹한 형벌을 공개한 것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샤를 달레 신부가 19세기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에 와서 보고 들은 경험을 모아 펴낸 '한국천주교회사'(1874년)에 실린 글을 보면 당시 조선에서 능지처참을 어떻게 행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머리가 몸뚱이에서 떨어진 뒤에 사지를 자른다. 그러면 머리, 몸뚱이와 합하여 여섯 토막이 된다. 옛날에는 팔다리를 잘라내는 데 도끼나 칼을 쓰지 않고, 팔다리를 소 네 마리에 잡아매고 소들이 사방으로 달려가도록 채찍질을 하여 목 잘린 사람의 사지를 찢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 속 주요 능지처사 사례

조선시대 능지처사형이 집행된 대표적인 사례는 사육신 사건입니다. 1456년(세조 2년) 7월 10일(음력 6월 8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붙잡힌 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성승·유응부·윤영손·권자신·박쟁·송석동·이휘 등이 군기감 앞에서 조정 대신들이 입회한 가운데 거열형을 당했습니다.

세조는 백관을 모아 빙 둘러서게 한 다음, 거열 장면을 보게 하였고, 이들의 머리는 사흘 동안 저자에 효수되었습니다. 심문 도중에 죽은 박팽년과 잡히기 전에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성원에 대해서도 따로 시체를 거열하고 효수하였습니다. 이들의 친자식들도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으며,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가 되었고, 가산도 모두 몰수되었습니다.

사육신의 경우 전원이 거열형을 당했는데, 박팽년과 유성원의 경우 형벌의 집행 전 옥사하거나 자살했지만, 역시 시신에 대한 거열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거열형은 형벌 중에 가장 극형으로, 시신의 온전한 수습은 사실상 어렵다고 봐야 하는데,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사육신의 한 명인 성삼문의 묘가 노량진과 논산에 있으며, 남이 장군 역시 화성과 가평 남이섬 등에 묘가 두 곳 이상 있는 경우입니다.

천주교 박해 시기에도 능지처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대역부도로 능지처사에 처해진 죄인은 황사영과 유항검·유관검 형제, 그리고 윤지헌 4명뿐이었습니다. 네 사람 모두 서양배를 몰고 와 신앙의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대박청래(大舶請來)' 문제에 연루되었습니다.

윤지헌(尹持憲, 1764∼1801) 프란치스코는 1801년 9월 17일에 처형되었는데, 그의 유골은 2021년 3월 전주 바우배기의 묘소에서 양 팔꿈치 아래와 두 무릎 아래가 절단되어 사라진 상태로 수습되었습니다. 2번 경추와 팔꿈치, 그리고 무릎에는 칼날에 절단된 자취가 남았습니다. 10년 전인 1791년 그의 형 윤지충과 사촌 형 권상연은 목만 잘렸는데, 윤지헌은 팔 다리까지 잘려서 전신이 여섯 도막이 났습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 생활을 하다 중국 상하이에서 암살된 김옥균은 주검이 조선으로 옮겨져 처참하게 능지처사당했습니다. 김옥균의 목은 양화진에서 효수되었습니다.

효수와 부가 형벌

능지처참이나 참형의 극형을 받은 자의 수급(머리)을 매다는 것을 효수(梟首)라 합니다. 장대에 꽂은 모습이 마치 올빼미(梟)의 머리(首) 같다 해서 이름 붙었습니다.

거열 뒤 잘린 머리는 효시(梟示) 혹은 효수(梟首)라 하여 대개 3일간 매달아 두었습니다. 지금의 종로2가 보신각 근처에 있던 철물교(鐵物橋)는 조선후기에 죄인의 머리를 내거는 단골 장소였습니다. 잘라낸 팔과 다리는 팔도 각 지역에 돌려 보게 하였는데, 이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역적은 반드시 능지처참하고 그 머리는 3일간 저잣거리에 내걸며, 수족은 8도로 조리돌려야 한다"는 《영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반역모반죄나 강상죄를 지은 자의 목을 내걸어 만백성의 본보기로 삼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능지처사형의 폐지와 역사적 의의

조선시대 거열형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폐지되었습니다. 중국의 경우도 청나라가 1905년에 '능지처사'를 폐지했습니다. 약 520여 년간 시행되었던 이 잔혹한 형벌은 근대화 과정에서 비로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잔혹하게 처형하는 가장 큰 목적은 '잠재적 범죄인'에 대한 겁주기에 있었습니다. 특히 역모죄의 경우 그 처참한 최후를 통해 '불충'을 경계하고 권력에 감히 도전할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컸습니다. 그래서 처형 장면을 공개하는 것은 물론 처형된 사람들의 머리를 효수하는 방식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꼿꼿이 소신을 밝히며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본보기는커녕 도리어 죽은 이들의 의기만 세워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성삼문은 죽을 때까지 임금(세조)을 '임금'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進賜)'라 불렀으며, 천주교 순교자들도 "천당과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치며

능지처참과 거열형은 전근대 시대의 가장 잔혹한 사형 집행 방법으로, 대역죄인과 강상죄인에게 적용되었던 극형이었습니다. 중국에서 기원한 능지형은 산 채로 살을 회 뜨는 형벌이었고, 거열형은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능지처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거열형으로 대체 집행했으며, 이마저도 대부분 참형 후 시신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이러한 극형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기까지 약 500여 년간 조선 사회에서 시행되었습니다. 비록 잔혹한 형벌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수많은 충신과 순교자들의 의기를 후대에 전하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