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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록 : 사도세자 사건과 시파·벽파 정치투쟁을 기록한 조선후기 역사서

by NewWinds 2025. 10. 18.

대천록의 정의와 의미

대천록(待闡錄)은 조선후기 문신 박하원(朴夏源, 1739~1806)이 1762년에 발생한 임오화변, 즉 사도세자 사건을 중심으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정치투쟁을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대천'이라는 제목은 '때가 열리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이 책이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즉시 공개될 수 없었던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천록은 조선후기 최대의 정치적 쟁점이었던 임오화변과 시·벽파 갈등에 대해 시파의 입장에서 정리한 대표적인 사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저자 박하원과 저술 배경

박하원은 남인 계열의 시파 인물로, 1792년(정조 16년)에 시파로서 상소를 올릴 때 그 소장을 작성한 바 있습니다. 그는 사도세자 사건에 얽힌 여러 가지 이면적인 문제를 철저히 정리하고 기록하여 처음에는 '천유록(闡幽錄)'이라는 이름으로 정조에게 올렸습니다. 박하원은 시파와 벽파의 갈등에 관한 것에 대해 의리를 진실하게 밝히기 위해서 자기가 직접 보지는 못하였지만, 귀로 들은 것과 문헌에 나타난 것을 바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노론의 벽파에 의해 사도세자 사건이 왜곡되거나 정치적 이념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후대에 전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유록에서 대천록으로의 개명

정조는 박하원이 올린 천유록을 읽고 그 내용에 동감하면서도, 당시 정치적 상황 등을 고려해 곧바로 세상에 내놓으면 여러 문제가 생길 것을 짐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정조는 이 기록이 세상에 나오기 이르다고 판단하여 '대천록'이라고 이름을 고치게 하여 박하원에게 다시 내려보냈습니다. 이는 정조가 이 책의 내용을 검증하고 인정했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공개를 유보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은 오랫동안 금서(禁書)로 취급되었습니다.

박하원의 운명과 후손들의 노력

정조가 죽고 벽파가 다시 득세하자, 박하원은 이전에 상소한 일과 천유록을 지은 일 등으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배소(配所)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806년(순조 6년) 벽파가 몰락하자, 박하원의 증손 박제대(朴齊大)가 원편 1통을 복사하고 1806년 이후 시·벽파의 사건에 관계되는 사실을 수집해 후록으로 붙여두었습니다. 박제대는 『와운유록(臥雲遺錄)』에 근거한 후편을 붙여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널리 발표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천록의 출간과 공개

대천록은 1897년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숭된 이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습니다. 박하원의 5세손 박승집(朴勝輯)이 1934년 서울 박문서관(博文書館)을 통하여 간행함으로써, 저술된 지 약 130여 년 만에 정식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활자본에는 정만조(鄭萬朝)의 서문과 이원영(李源永)의 발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천록의 구성과 체재

대천록은 상편·중편·하편과 후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편년체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간지(年干支)와 월일을 기재하고, 1건이 끝나면 끝에 전거(典據)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10권 10책의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규장각에도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박하원의 저술은 상편 2책과 중편 6책이고, 박제대의 저술은 후편 2책입니다.

상편의 주요 내용

상편에는 영조 즉위와 동시에 노론의 득세, 효장세자의 죽음, 사도세자의 탄생과 성장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시 김상로·홍계희 등과의 갈등, 그리고 노론 계통인 벽파의 질책을 받는 경위가 상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1757년(영조 33년) 정성왕후의 죽음 이후 문녀(文女)와 화완옹주의 방자함, 이종성 등의 사도세자 지지, 영조와 홍봉한의 입장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인 계통인 시파에서 세자를 동정하는 경위가 엮어지면서, 1762년 세자의 죽음까지의 과정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중편의 주요 내용

중편에는 왕세손에 관한 기사와 사도세자의 복위, 영조의 승하와 정조 즉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 사업, 시파 형성과 벽파 배척, 시파가 다소 힘을 얻게 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원에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묘를 천봉하고 『장릉지(莊陵誌)』를 개찬하게 하는 등의 내용과 함께, 노론 시파와 남인의 임오의리 천명 요구, 임오의리에 대한 벽파의 입장, 정조의 임오의리 처분 등 1791년까지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편과 후록의 내용

하편은 1792년 시파의 잇따른 상소와 벽파가 몰리는 상황 등으로 1800년 정조의 죽음까지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정조의 승하와 순조의 즉위,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의 벽파 득세와 시파의 몰락, 1805년(순조 5년) 이후 벽파의 몰락과 시파의 재등장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록은 순조 즉위 후 벽파의 득세와 1807년 벽파가 다시 몰락하는 경위를 저자의 증손 박제대가 추후로 수록(手錄)한 것입니다. 후록은 1806-1807년(순조 6-7년)의 기록으로 순조와 시파가 중심이 되어 임오의리를 천명하고 벽파를 숙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천록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행적

대천록에는 사도세자가 내시, 무수리,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 명에 이르렀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편에는 "세자가 중관, 내인, 노속을 죽인 것이 장차 백여 명에 이르고 낙형(烙刑) 등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쇠끝을 달구어 피해자의 피부를 지지는 등의 고문 행위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사도세자를 동정하고 옹호하는 취지로 쓰여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포함되어 있어,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대천록의 역사적 가치와 신빙성

대천록은 정조가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검증한 책이라는 점에서 높은 신빢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정조는 이 책을 읽고 내용은 동의하면서도 당장 공개될 수 없는 책이라 하여 제목을 대천록으로 바꾸게 했으며, 이는 정조에게 검증받은 책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대천록에 적시된 사실을 『한중록』, 『승정원일기』, 『영조실록』, 『임오일기』, 『이재난고』, 『현고기』, 『정조의 홍재전서』 등 다양한 기록들과 교차 비교하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파와 벽파의 정치투쟁 기록

대천록은 조선후기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시파와 벽파의 대립과 갈등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시파에 속한 박하원이 사도세자 사건을 주제로 하여 시파 입장에서의 의리를 천명한 것입니다. 이는 정조가 명해 찬한 『명의록(明義錄)』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책은 시·벽파의 대립과 갈등을 통한 정세(政勢)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며, 임오화변과 관련된 정치적 역학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대천록의 현존 자료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는 10권 10책의 필사본이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으며, 크기는 25.7 X 19.3cm입니다. 표지는 만자문(卍字紋)으로 되어 있고, 좌측에 표지 서명과 책차가, 우측에 편명이 필사되어 있습니다. 각 책 제1면 우측 상단에는 '이왕가도서지장(李王家圖書之章)'이 날인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괘선이 없는 종이에 정서되었고, 종이를 도려내거나 덧붙여서 수정한 부분이 있어 저술 과정의 신중함을 보여줍니다. 규장각에도 편자 미상의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인쇄본이 나오기 전의 것으로 짐작됩니다.

대천록과 다른 역사 기록과의 관계

대천록은 『한중록』, 『승정원일기』, 『영조실록』 등 조선시대의 다른 역사 기록들과 함께 사도세자 사건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폐세자반교문(廢世子頒敎文)은 공식 기록인 『승정원일기』나 『영조실록』에 실리지 않고, 『대천록』, 『현고기』, 『모년기사』 등 개인 문집에만 전해져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됩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서로 보완하며 18세기 조선 정치사의 복잡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대천록 연구의 현대적 의의

대천록은 사도세자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의 중심에 있는 자료입니다. 국문학자 정병설 교수는 『대천록』, 『영조실록』 등 다양한 기록들과 교차 비교를 통해 『한중록』의 신빙성을 높이 평가하며, 사도세자 사건에 대한 학술적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대천록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록한 것을 넘어, 역사가 어떻게 서술되고 해석되는지, 그리고 정치적 입장이 역사 기록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현대 역사학 연구에서도 대천록은 조선후기 정치사, 당쟁사, 왕실사 연구의 핵심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