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따라의 어원적 정의와 언어적 기반
딴따라는 연예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관악기 소리를 빗댄 영어 의성어 'tantara'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용어는 1950년대 후반부터 신문에서 '딴따라풍 유행가' 같은 표현이 나오면서 많이 알려졌으며, 특히 '딴따라 같은 삼류 인생', '딴따라 주제에'처럼 쓰이면서 가수와 배우를 비하해 부르는 용어로 굳어졌다.
어원에 대한 다양한 설
딴따라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영어 의성어 'tantara'에서 나왔다는 설로, 이는 트럼펫이나 호른 등 취주악 소리를 들리는 대로 적은 것이다. 아마 미8군 등을 통해 흘러나온 말로 보이며, 주한미군을 거쳐 해당 영어 표현이 한국에도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유랑극단이 홍보를 위해서 태평소, 북, 꽹과리 등을 요란하게 연주하면서 동네를 행진하던 것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다. 세 번째로는 1921년 해삼위(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학생음악단 공연에서 기원한다는 설도 있는데, 공연 중 코팍춤 순서에서 관객이 러시아 음악에 맞춰 손뼉을 치며 입으로 박자를 맞추던 '딴따라, 딴따라'가 자연스럽게 입에 익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언어적 특성과 변화
딴따라는 본래 '풍각(風角)장이'라는 우리말과 대응되는 개념이었다. 풍각장이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한 끝에 돈을 구걸하던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음악인 일반을 낮추어 일컬을 때 쓰이게 되었다. 그 '풍각장이'가 '딴따라'라는 신식말로 바뀐 것으로, 가사를 안 붙이고 곡만으로 노래할 때는 '딴따라딴…' 같은 소리로 대체하여 부르던 것도 이 무렵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 변천과 사회적 의미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딴따라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60년대였다. 당시 연예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곱지 않았으며,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는 집안의 반대가 엄청났다. 이 시기 연예인의 부정적인 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이 대중매체였는데, 특히 주간지의 선정적 보도가 한몫했다.
딴따라의 대명사격인 '유랑극단'이 처음 생기게 된 것은 1920년대였으며, 이 시기에 전성기를 이뤘다. 1940년대 들어 최초로 무대 MC가 등장했는데, 평양에서 창단된 극단 '인간좌'의 사회를 맡은 것은 전방일이라는 만담꾼이었다. 이들이 서는 시간을 '막간무대'라고 불렀으며, 본 무대가 오르기 전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노래와 춤, 만담을 공연했다.
군사정부 시대의 수난
이른바 '딴따라'의 수난시대는 군사정부 때였다. 권력자들이 파티를 열 때 연예인을 불러 공연을 시켰고, 거절하면 마약남용이나 풍기문란 같은 혐의를 붙여 뒤끝 작렬한 보복을 가했다. 한국 록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신중현에게도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압박이 들어왔고, 그가 여러차례 거절하자 보복이 뒤따랐다. '미인' 같은 히트곡이 줄줄이 금지곡이 됐고, 방송 출연을 금지당하고 업소 출연마저 막히게 되었으며, 신중현은 1975년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고 연예인협회에서도 제명되는 시련을 겪었다.
민중문화 운동과의 결합
1980년대 민중문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부 예술인은 스스로 딴따라라고 불렀다. 당시 예술인들이 스스로 딴따라라고 한 것은 삶과 괴리된 채 고상한 척하는 예술을 거부하고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겠다는 뜻이었다.
사회적 편견과 인식의 변화
전통적 편견의 뿌리
광대, 딴따라, 떠돌이, 풍각쟁이는 물론이요, 각설이, 품바 등 호명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그 편차가 심했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인간 이하, 저질, 수준 이하, 멸시, 무시, 소외, 재수 없다, 징그럽다" 등의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부유한 집안 출신 등 이른바 상당한 학력과 자본을 소유한 예술인이라고 다를 게 없었으며, 광대, 딴따라는 일종의 푸념이요, 사회에 대한 반항이요,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었을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예술하는 이들을 무조건 천것이라 깔보는 사람들의 편견이 연예인을 얕잡아 부르는 '딴따라'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정도였다. 젊고 예쁜 여자들을 옆에 끼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 유력인사를 초대해 사업을 도모하는 행태가 사라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여자 연예인을 아무렇게나 소모해도 되는 물건 취급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현대적 인식 전환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고 선진화되면서 '딴따라'는 '스타'나 '아티스트' 같은 말로 바뀌었다. K팝 가수들이 환경·빈곤·불평등·다양성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기부를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이런 인식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방탄소년단(BTS)은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을 찾아 아시아계를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를 놓고 의견을 나누기도 했으며,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청년·미래세대를 대표해 연설하기도 했다.
송해와 딴따라의 재해석
딴따라의 아이콘, 송해
40년간을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맡아 MC계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송해는 스스로 자신을 '딴따라'라고 했다. 연예인을 가리키는 비칭이지만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으며, 그는 트롯 '딴따라'를 즐겨 불렀다.
송해의 대표곡 '딴따라'는 그의 인생을 표현한 곡으로, 가사에는 "강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 / 풍악 따라 걸어온 유랑의 길 / 바람 속에 청춘이 간다 / 인생이 이거라고 이거라고 / 어느 누가 말할 수 있나 / 아~ 오늘은 어디에서 / 임자 없는 내 노래를 불러 보나 / 가진 건 없어도 행복한 인생 / 나는 나는 나는 딴따라"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딴따라의 재평가
송해는 "나는 딴따라다"고 당당히 밝혔으며, 이는 '딴따라'의 위상과 가치를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때는 '천하고 가난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딴따라였지만, 그들 인생에는 낭만이 있었다. 분명 예술적 기질이 남달랐던 딴따라들은 자신의 노래와 행위에 관객이 웃고 즐거워 하면 만족했으며, '가진 건 없어도 행복한 인생'이라는 자세를 보였다.
현대 문화에서의 딴따라
K-팝과 글로벌 인식 변화
과거 딴따라로 취급받던 춤꾼들의 반란이 시작됐다. 90년대 바닥을 휘휘 청소하던 힙합바지에 눈을 가려 앞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헤어스타일로 거리를 활보하던 춤꾼들은 어른들의 욕받이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겐 꿈이자 희망의 아이콘으로 변했다.
'스트릿 맨 파이터·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10대부터 소싯적 춤에 대한 꿈이 없었던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관절을 오랜만에 움직이게 했다. 그 덕분에 댄서들의 몸값은 요즘 몇 안 되는 상종가 종목 중 하나가 되었으며,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러브콜이 쏟아지는 한국 댄서의 인기에 직업 생태계 조성은 물론, 바닥이었던 시장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예술인 복지와 사회적 지위
일부 기성세대는 예술계 종사자들을 두고 '딴따라'라며 비하하기도 하지만, 실제 예술인들은 각 분야별 활동을 통해 국가 발전과 국민 정서에 기여하고 있다. 예술인복지법 시행과 더불어 예술인의 자립을 위해 스스로 발언하고자 하는 집단적 움직임의 일환으로 '예술인 소셜유니온', '뮤지션 유니온' 등이 출범하였다.
사회적 편견의 지속과 과제
여전한 편견의 존재
그런데 일부 정치권은 이런 시대 변화에 뒤떨어진 듯하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대통령실 인사비서관 부인의 나토 정상회의 동행 논란과 관련해 "방탄소년단도 수시로 (문재인 전 대통령의) 해외 방문 때마다 동원돼 퍼포먼스를 벌이지 않았냐"고 말했다. 이는 대중문화인을 정치가 필요하면 '동원' 가능한 대상으로 보는 인식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경제적 현실과 사회적 인식
세상이 변해서 광대와 딴따라는 이제 예술가로 불린다. 하지만 과거의 인식은 그대로 남아 '예술가'라는 호칭 뒤에 여전히 '광대-딴따라'라는 꼬리표가 은연중에 붙어있다. 사회의 편견은 여전하고 예술가의 자존감은 추락을 멈추지 않으며, 여느 직업 못지않은 전문성을 갈고 닦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명칭만 보면 사회적 인식과 지위가 높아진 것 같지만, 신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세계에서 자본의 관심을 끌 만한 극소수를 제외하고 예술가라고 불리는 이들의 사회적 신분은 여전히 최빈곤층에 가깝다. 예술가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도입한 예술 강사 제도는 오히려 창작의 걸림돌이 되었으며, 많은 춤꾼이 생계 때문에 연습 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 공연 참가가 어려워진 것이다.
결론: 멸시에서 존경으로의 여정
딴따라라는 용어는 단순한 언어학적 현상을 넘어 한국 사회의 예술인에 대한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단어이다. 영어 의성어 'tantara'에서 시작되어, 일제강점기와 군사정부 시대를 거치며 연예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굳어졌던 딴따라는, 이제 K-팝의 세계적 성공과 함께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송해와 같은 예술인들이 스스로를 딴따라라고 당당히 밝히며 그 의미를 재정의했고, BTS를 비롯한 K-팝 아티스트들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예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크게 변화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에서는 예술인을 '동원' 가능한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남아있어, 진정한 인식 개선을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딴따라의 역사는 결국 한국 사회가 예술과 예술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거울이다. 멸시와 편견에서 시작된 이 용어가 이제는 자긍심과 당당함의 상징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성숙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다. 앞으로도 예술인들이 사회적 편견 없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