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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꾼 뜻 : 곡식 만 섬가량을 거두어들일 만한 논밭을 가진 큰 부자를 뜻하는 말

by NewWinds 2025. 10. 21.

만석꾼의 정의와 어원

만석꾼은 조선시대부터 근대 초기까지 사용되던 표현으로, 곡식 만 섬가량을 거두어들일 만한 논밭을 가진 큰 부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서 '석'은 '섬'과 같은 단위로, 쌀이나 곡식의 무게를 측정하는 전통적인 단위입니다. 한자로는 石으로 표기되며, '꾼'은 어떤 사물이나 특성을 많이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접미사입니다.

 

만석꾼이라는 용어는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부의 척도가 곡식, 특히 쌀이었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쌀이 곧 재산이었고, 넓은 농토를 보유한 사람이 사회에서 절대적인 부자로 인정받았던 것입니다.

만석의 실제 규모와 가치

만석꾼의 '만석'이 실제로 얼마나 큰 규모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쌀 한 석은 약 144킬로그램에서 160킬로그램 정도로 측정되며, 이는 성인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고살 수 있는 양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만석은 1,440톤에서 1,600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곡식입니다.

 

쌀 한 석은 두 가마니에 해당하므로, 만석꾼은 일 년에 쌀 2만 가마니를 수확하는 규모입니다. 현재 쌀 20킬로그램 한 포대의 가격이 약 5만 원이라고 할 때, 만석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36억 원에서 40억 원에 달하는 연 수입을 의미합니다. 이는 조선시대 기준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뜻했으며, 지금으로 치면 연봉 순위 최상위 0.1%에 해당하는 수준입니다.

 

만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토지가 필요했을까요. 한 마지기는 보통 200평 정도이며,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한 마지기에서 1석에서 2석 정도의 쌀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보수적으로 계산하면 만석을 생산하려면 5,000마지기에서 10,000마지기, 즉 100만 평에서 200만 평의 논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축구장 500개에 달하는 면적으로, 국립대전현충원의 전체 부지와 비슷한 규모입니다.

 

논 시세를 평당 10만 원으로 계산하면 만석꾼의 토지 자산만 800억 원에서 2,000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이는 현대의 대기업 총수에 버금가는 부를 의미합니다.

만석꾼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

만석꾼은 단순히 땅이 많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재산뿐만 아니라 사회활동 능력, 당국의 신용, 사회적 인망 등 유지로서 필요한 모든 기반을 갖춘 인물들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만석꾼들은 이른바 '관료-유지 지배체제'에서 '돈과 빽'을 재생산하는 유지정치를 전개하는 핵심 인물들이었습니다.

 

만석꾼들은 수십 명의 노비와 수백 명의 소작농을 거느렸으며,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는 동시에 지역 유지로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많은 만석꾼들은 곡간 창고를 운영하고, 사립학교나 향교를 후원하며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조정에서 세금이 부족하거나 흉년이 들었을 때는 만석꾼 집안에서 쌀을 빌려 급한 불을 끄기도 했을 정도로 경제적 영향력이 막강했습니다.

 

고을 원님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만석꾼들은 오늘날 대기업이 정부의 큰 프로젝트에 자금을 투자하는 모습과 유사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만석꾼의 실존 사례

역사 속에는 실제로 만석꾼으로 불렸던 인물들이 여럿 존재합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경주 최부잣집으로, 12대 약 300년 동안 만석꾼의 부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고운 최치원의 후예인 경주 최씨 가문으로, 17세기 초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9명의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의 파시조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워 가문을 일으켰습니다. 최부잣집은 빠르게 이앙법을 도입해 소출량을 늘렸고, 소작농들에게 수확량의 절반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병작제를 시행하여 부를 축적했습니다. 다른 부잣집들이 수확량의 70% 정도를 소작료로 받았다면, 최부잣집은 40%에서 멈춰 소작농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돌려주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 외에도 진주 지역에서는 여러 만석꾼이 배출되었습니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아버지가 만석꾼이었으며, 효성그룹 창업주 만우 조홍제의 부친은 사천석꾼이었으나 만우 본인이 금융조합을 하면서 만석꾼이 되었습니다. LG의 연암 구인회도 같은 지역 출신으로, 진주 일대는 만석꾼을 여럿 배출한 지역으로 유명했습니다.

 

1930년 일제강점기 때의 조사에 따르면, 천석꾼은 약 750명, 만석꾼은 약 4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대다수가 배를 곯던 시절에 만석꾼이 얼마나 희귀하고 특별한 존재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천석꾼과 만석꾼의 비교

만석꾼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용어가 천석꾼입니다. 천석꾼은 곡식 천 석을 거두어들일 만큼 땅과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를 뜻합니다. 쌀 한 석이 약 160킬로그램이므로, 천 석은 14만 4천 킬로그램이며, 이는 약 8만 평 정도의 논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천석꾼은 연 수입 약 4억 원 정도의 부자입니다. 필요한 토지는 약 1,000마지기, 즉 20만 평 정도입니다. 예부터 "천석꾼은 나라가 내리고 만석꾼은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천석꾼도 대단한 부자이지만 만석꾼은 하늘의 뜻이 닿아야만 될 수 있는 더욱 특별한 존재였다는 의미입니다.

만석꾼의 경영 철학과 나눔 정신

만석꾼들, 특히 명성을 얻은 만석꾼들은 단순히 부만 축적한 것이 아니라 독특한 경영 철학과 나눔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은 여섯 가지 가훈으로 유명한데, 그 중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훈입니다. 이는 권력을 탐하지 말라는 의미로, 벼슬을 하면 욕심이 끝이 없고 정쟁에 휘말려 가문이 몰살되는 위기를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최부잣집은 정경분리를 실천하며 부에 집중했습니다.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가훈입니다. 최부잣집은 1년 소작료 수입이 만석을 넘으면 그 이상은 소작료를 낮춰 받거나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이러한 상생의 정신으로 소작농들은 더욱 열심히 일했고, 결과적으로 최부잣집의 재산도 계속 불어났습니다.

 

셋째, "사방 백 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입니다. 흉년이 들면 자신들의 곳간을 열어 양식을 나눠주고, 과객들을 극진히 대접하며 노잣돈과 양식을 챙겨 보냈습니다.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경주 최부잣집은 한국 역사상 유례없는 존경받는 부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최부잣집은 노비들에게도 "더불어 일하고 일한 만큼 나누어 갖는다"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나눔과 상생, 믿음과 감동의 바탕 위에서 지주, 소작농, 일꾼, 노비 모두가 윈-윈하는 상생과 협력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만석꾼의 몰락과 역사적 변화

일제시기 만석꾼들의 정치·경제적 지위는 1930년대 초반 공황과 전쟁을 경과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 들어 토지수익률이 떨어지고 농외투자에 실패하는 과정에서 많은 만석꾼들이 몰락했습니다.

 

특히 해방공간의 토지개혁과 한국전쟁, 화폐개혁을 통해 조선의 만석꾼들은 결정적인 몰락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토지매상의 대가로 지불받은 지가증권은 거의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일부 만석꾼들은 귀속사업체 불하 등 정부의 특혜정책에 힘입어 전업에 성공하기도 했으며, 의사나 교수, 판검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업인으로 변신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만석꾼들의 몰락을 부추긴 또 다른 요인은 농민운동의 성장이었습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로", "노동자 농민이 주인인 사회를 건설하자"는 구호가 제기되었고, 이는 해방 이후 남북한 모두에서 관철되었습니다. 높은 향학열과 도회열에 불타던 청년 농민들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만석꾼 체제는 더욱 빠르게 무너져갔습니다.

 

경주 최부잣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최씨 가문의 부는 독립운동에 막대한 재산을 지원하고, 광복 후에는 교육사업에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1700년대부터 이어진 300년 동안의 부를 마감했습니다. 현재 경주 최부잣집의 관리와 재산권은 영남대학교에 있으며,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손자에게는 유산 한 푼 없었다고 합니다.

만석꾼과 관련된 속담과 문화

만석꾼과 관련된 속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입니다. 이는 재산이 많으면 그만큼 걱정거리도 많이 생긴다는 의미로, 사람은 누구에게나 저마다 한 가지씩은 걱정이 있기 마련이므로 이를 참고 극복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만석꾼 집 자식이 굶어 죽는다"는 속담도 있는데, 이는 부유한 집안일수록 자식들이 근면하지 못하고 가세가 기울기 쉽다는 경고입니다. "곡식 많은 집일수록 인심은 야박하다"는 말처럼, 많이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인색하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만석꾼에 대한 시선이 양면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러워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만석꾼들이 착취적인 지주로 지역민에게 원성을 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주 최부잣집처럼 소작농의 자립을 돕고 교육에 투자한 선한 영향력의 만석꾼들도 존재했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만석꾼

예전처럼 쌀을 기준으로 부를 따지지는 않지만, '만석꾼'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오늘날에는 단순히 돈 많고 재산 많은 사람, 또는 지역에서 잘나가는 사람을 말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여기서 자그마치 40년째 식당을 하셨어요. 지금은 만석꾼 소리 듣죠"라거나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던 만석꾼 아들하고 결혼한 거예요"처럼 사용됩니다.

 

서양에서는 백만장자를 뜻하는 '밀리어네어'나 억만장자를 뜻하는 '빌리어네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우리나라의 만석꾼은 이와 유사한 개념입니다. '만'이라는 숫자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상상 가능한 최고치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만석은 부의 절정, 즉 상징적 완성을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부자의 기준은 달라졌습니다. 부자학연구학회에서는 총재산 30억원에서 50억원, 현금성 자산 10억 원 이상을 가진 사람을 부자로 봅니다. 관련 학회와 금융기관은 금융자산이 10억 원 이상이면 VIP 고객으로 분류합니다.

 

최근 잡코리아와 알바몬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평균 49억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어야 부자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2016년의 32억 원에서 크게 상승한 수치로, 부자에 대한 눈높이가 해마다 계속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만석꾼이 현대에 주는 교훈

만석꾼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부자 이야기가 아닙니다. 특히 경주 최부잣집과 같은 사례는 현대 사회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진정한 부는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둘째, 권력과 부를 분리하고 본업에 충실해야 오래 지속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 직원과 협력자들과 상생하는 경영 철학이 결국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입니다.

 

"부자는 많은 사람의 밥상"이라는 속담처럼, 떳떳하게 벌어 뜻있게 쓰는 부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에도 경주 최부잣집처럼 나눔의 철학을 지키거나 빌 게이츠처럼 기부를 즐거움으로 여기는 부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만석꾼이라는 용어는 비록 농경사회의 산물이지만, 그 속에 담긴 진정한 부의 의미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가르침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재산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재산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점이며, 이것이 바로 만석꾼의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만석꾼과 토지 단위의 이해

만석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의 토지 단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마지기는 논밭의 면적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위로, 한자로는 두락이라고 합니다. 마지기는 씨앗 한 말을 뿌릴 수 있는 면적을 의미하며, 지역에 따라 그 크기가 다소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논 1마지기는 약 200평으로 간주되지만, 지방에 따라 150평에서 300평까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경기도의 경우 논 1마지기는 약 150평, 충청도는 200평, 강원도는 300평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단위가 지역마다 다른 이유는 마지기가 고정된 수치가 아니라 토지의 지형이나 토질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밭의 경우 1마지기는 약 100평에서 300평 정도였으며, 논보다는 일반적으로 더 넓은 면적을 의미했습니다. 현대 단위로 환산하면 1마지기는 대략 300제곱미터에서 1,000제곱미터 정도입니다.

석과 섬의 관계

석과 섬은 같은 단위로, 곡식의 양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도량형입니다. 한 석 또는 한 섬은 대두 10말에 해당하며, 지금의 쌀가마는 대두 5말 또는 소두 10말이므로 대략 한 섬은 2가마가 됩니다. 쌀 한 가마니는 약 80킬로그램이므로, 한 석은 약 160킬로그램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벼 한 섬이 쌀로는 두 가마니를 뜻했으므로, 천석꾼은 1년에 쌀 2,000가마니, 만석꾼은 2만 가마니를 수확하는 규모였습니다. 이는 성인 1인의 연간 소비량이 약 1석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만석은 1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었습니다.

만석꾼의 생활상

만석꾼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만석꾼들은 수백 마지기의 논밭을 소유했고, 수십 명의 노비와 수백 명의 소작농을 거느렸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은 만석꾼이 아니라 그 밑의 사람들이었으며, 만석꾼은 소작인들의 수고로 곡식을 얻고 그중 일부만 소작농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경주 최부잣집의 경우, 집안에 살았던 하인만 약 100여 명이나 되었고, 부지가 약 2,000여 평, 후원은 약 1만 평으로 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습니다. 쌀을 보관하는 뒤주는 한 번에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크기였습니다.

 

많은 만석꾼들은 곡간 창고를 운영하고, 사립학교나 향교를 후원하며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경주 최부잣집은 과객들의 쉼터로 유명했는데, 어떤 손님이라도 극진히 대접하고 노잣돈과 하루 양식을 챙겨 보냈습니다.

만석꾼 개념의 확장과 변형

시대가 변하면서 만석꾼의 개념도 변화했습니다. 1945년 광복을 전후한 시기까지 우리나라에서 부자의 대명사는 천석꾼이나 만석꾼이었으나, 이후 백만장자라는 개념이 도입되었습니다. 백만장자를 의미하는 '밀리어네어'는 1719년 프랑스의 스티븐 펜티먼이 처음 사용한 용어로, 화폐가치가 달라지면서 지금은 큰 부자를 일컬을 때 1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빌리어네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2008년 기준으로 100만 달러 이상의 현금성 자산을 소유한 한국인은 약 10만 5,000여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2013년 한 해 금융소득 100억 원 이상인 사람이 49명이었습니다. 연 수익률을 5%로만 계산해도 금융자산이 2조 원을 넘는 진짜 부자들입니다.

 

KB금융의 '2015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10억 원 이상 금융자산가가 18만 2,000명이며, 전체 국민의 0.35%인 이들은 평균 22억 3,000만 원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21년 기준으로는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 부자가 24만 2,000명으로 증가했습니다.

결론

만석꾼은 단순히 곡식이 많았던 과거의 부자를 지칭하는 용어를 넘어서, 한국 사회가 부와 재산을 어떻게 인식하고 평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개념입니다. 곡식 만 섬을 거둘 수 있는 논밭을 가진 만석꾼은 현대의 가치로 환산하면 연 수입 수십억 원에 토지 자산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에 달하는 대부호였습니다.

 

만석꾼의 역사는 또한 진정한 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경주 최부잣집처럼 300년 동안 12대에 걸쳐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히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상생의 정신을 실천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사방 백 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최부잣집의 가훈은 오늘날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농경사회의 산물인 만석꾼이라는 용어는 현대에는 비유적으로만 사용되지만, 그 속에 담긴 부에 대한 철학과 사회적 책임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재산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재산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점이며, 이것이 바로 만석꾼의 역사가 현대 사회에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만석꾼, 천석꾼, 백만장자, 억만장자 등 부자를 지칭하는 용어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지지만, 진정한 부자는 떳떳하게 벌어 뜻있게 쓰는 사람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부자는 많은 사람의 밥상"이라는 속담처럼, 부가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 그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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