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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 민족의 혼을 깨운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by NewWinds 2025. 8. 30.

서론

한용운(1879-1944)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역사에서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로서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며 민족의 정신을 일깨운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불교 승려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했으며, 문학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민족의 정신을 고양시켰다. 만해(卍海)라는 법호로도 널리 알려진 그는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불교계의 개혁과 현실 참여를 이끌었다. 또한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그의 시는 개인적 감정을 넘어 민족적 비애와 희망을 담아내는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본 글에서는 한용운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가 남긴 사상적 유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생애와 성장 배경

출생과 어린 시절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아전 출신인 한응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유천(裕天)이었으며,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계명은 봉완(奉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던 그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학문적 기초를 다졌다. 6세 때 《통감》을, 7세 때 《대학》을 읽고 이해할 정도로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였다.

동학농민운동과 방랑 생활

한용운의 아버지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가족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16세에 아버지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한용운은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홀연히 사라져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14세 때 결혼했던 그는 고향의 처가에 돌아와 약 2년간 은신하다가 다시 방황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출가와 승려 생활

1905년, 26세의 나이에 한용운은 백담사에서 득도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는 출가 후에도 만주와 시베리아를 방랑하다가 귀국하여 안변의 석왕사에서 참선하는 등 불교적 수행과 함께 방랑 생활을 이어갔다. 1911년에는 만주에서 교포로부터 밀정으로 의심받아 총격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그의 만성요두증(慢性搖頭症)의 원인이 되었다.

불교 개혁과 사상적 활동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 개혁 운동

한용운은 출가 이후 조선 불교의 낙후성과 일본 불교의 침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불교는 일제의 정책에 의해 종교적 자유를 제한받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불교는 국민의 정신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불교의 개혁과 현실 참여를 주장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한용운은 불교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진보적 계몽주의자가 되었고, 근대적인 자유주의를 불교적 평등의 개념에 흡수했다. 그러면서도 자유주의에 결부되기 쉬운 이기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불교의 보살 정신을 사회 개혁의 사상적 기점으로 확인했다. 혼돈의 시대에 근대 사상의 진보적 측면을 불교 속에 철저히 여과하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사회주의 사상

한용운은 "종교는 인중을 지도하여 그들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에 종교의 본질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교의 근본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대중의 행복을 신장시키기 위해 시대적 변용과 방편적 응용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불교가 당대는 물론 미래 사회에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대정신을 잘 읽어 불교적 방편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특히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에 항거하여 종교의 가치와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종교가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과 의미들을 강조했다. 그는 "종교를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부르조아의 향락적 유희물로 보아서 자본주의 몰락과 동시에 종교도 사멸하리라고 보는 것은 종교에 대한 인식부족의 착각"이라고 비판하며, "불교와 같은 것은 교리 자체에 있어서 평등주의 비사유주의, 즉 사회주의의 소질을 구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3·1 운동과 민족대표 33인

1919년 3월 1일, 한용운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1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강력히 표명했다. 특히 한용운은 천도교 측에 독립운동을 제안했고, 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추서하는 등 불교계 대표의 역할을 했다.

그는 1919년 1월경에 천도교의 최린을 찾아가 독립의 기회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당시 천도교는 민족자결주의라는 변수를 활용하여 자체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최린은 공동으로 독립운동에 나서자는 제안을 불교의 한용운에게서 받자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에 즉시 종교 연합의 형태로 3·1 운동이 조직화되었고, 한용운은 최린과 함께 3·1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옥중 투쟁과 독립 의지

한용운은 3·1 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21년 7월 10일,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이유서>를 제출했고, 1921년 43세에 만기 감형으로 출옥했다. 재판을 받으면서 그는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일제 검사가 "피고는 왜 말이 없는가?"라고 묻자 한용운은 "조선인이 조선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하는 것은 백번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무슨 재판인가. 나는 할 말이 많다. 종이와 펜을 달라"고 대답했다.

또한 일본 판사가 "독립운동을 그만두겠는가?"라고 묻자 한용운은 "그렇소. 쉬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지 해 나갈 것이오. 우리는 반드시 독립을 이룰 것이라 믿소. 조선에는 승려 한용운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일본 판사가 "그런 생각을 고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자 한용운은 "나는 내 나라를 세우는데 힘을 다한 것이니, 벌을 받을 리 없을 줄 아오"라고 했으며, "그 마음을 고치겠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소.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원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오"라고 답했다.

신간회 활동과 지속적인 독립운동

한용운은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고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겸직했다. 그는 출옥 후에도 강연, 조선물산장려운동 지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특히 그는 3·1 운동 이후 다른 민족 대표들이 탄압과 회유에 넘어가 변절한 것과 달리, 지조를 지켜 많은 청년의 존경을 받았다.

문학적 업적과 시인으로서의 활동

시집 《님의 침묵》과 문학적 성취

한용운은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지도자로 활동하면서도, 문학가로서의 업적 또한 빛을 발했다. 1926년에 발표한 시집 《님의 침묵》은 그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으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시집은 당시 수렁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한 의도적 기획으로 쓰여졌다.

《님의 침묵》은 표면적으로는 남녀간의 아기자기한 사랑의 애환을 노래하면서, 그 심층에 당대의 빼앗긴 현실과 민족을 되찾으려는 끈질긴 극복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에 수록된 88수의 시 대부분이 전부 연애시이며, 그 서정성은 그렇게 넘기기에는 너무나 절절하다는 평가도 있다.

시의 특징과 사상적 배경

한용운의 시는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특히 그의 시에는 경어체가 사용되었고, 주제는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이다. 임은 한용운 시인의 다른 작품에서와 같이 '연인, 조국, 부처, 절대자' 등을 의미한다.

한용운 시에 나타난 유토피아 사상의 특성은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대안의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다. 부정적 현실 비판의식의 측면에서는 '님의 침묵과 진리 부재의 현실', '주권 상실과 불평등한 사회현실'의 양상을 보이고, 대안적 사회상의 측면에서는 '불성 회복과 극락정토', '구세주의와 평등사회'의 양상을 보인다.

심우장과 말년의 생활

심우장의 건립과 의미

1933년, 한용운은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집을 지었다. 심우장은 '소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소가 마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본성을 찾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한옥이 대부분 남쪽을 향한 것과 달리, 심우장은 그늘이 드리운 북향 집이라는 것이다. 이는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이 남향으로 집터를 잡으면 당시 남쪽에 위치한 조선총독부 건물과 마주하므로, 이를 피해 일부러 북향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출한 한옥으로, 왼쪽 끝 칸은 사랑방, 가운데 2칸은 안방, 오른쪽 끝 칸은 부엌에 해당한다. 벽산(碧山) 스님이 기증한 집터에 지어진 심우장은 만해 선생이 거처하던 사랑채 밖에는 함께 독립운동을 한 서예가 오세창 선생이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말년의 활동과 사망

한용운은 말년에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으며, 그의 생계는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방응모, 만공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그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했다.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생했을 때 한용운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이튿날인 6월 29일 만해 한용운 대선사는 심우장에서 승랍 49세, 세수 65세로 열반에 들었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해방을 불과 14개월 앞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다.

한용운의 사상과 철학

불교적 유토피아 의식

한용운의 불교적 유토피아 의식은 일제 하 고통스런 민족적 현실에서 불법의 회복을 통한 불국토가 건설되길 꿈꾸면서, 그러한 현실적 실천의 한 방편으로 불교사회주의에 해당하는 평등사회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자리 잡길 염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불성 회복과 극락정토'의 형상은 「이별은 미의 창조」라는 작품을 통해 불교적 사상에 기반을 둔 역설적 인식으로 보다 고난에 찬 경험이 불법을 되찾게 되리라는 진리의 확신으로 제시되면서, 현실 속에서 갈망하는 극락정토의 이미지를 민족적 구원의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불교사회주의의 결합

한용운은 불교사회주의 사상을 통해 일제 하 우리 민족을 대상으로 대승적 보살정신에 입각한 중생 구제의 사상을 피력했다. 그는 「명상」이라는 시를 통해 불교사상으로 볼 수 있는 무계급성과 평등정신, 물질적 궁핍이 없는 사회성을 그려내어 이상적 사회상을 제시했다. 이는 그가 당대에서 말하고 있는 불교사회주의 사상의 구체화 형태로 볼 수 있다.

한용운의 유산과 현대적 의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평가

한용운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추증받았다. 그는 3·1 운동 뒤 3년간 복역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그는 일제의 '내선 불교 정책'에 강력히 저항했는데, 31본산을 결성하고 그를 연사로 초청했을 때 "세상에 제일 더러운 것은? / 똥! /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 썩고 있는 시체! / 그보다 더한 것은? / 31본산 주지 너희 놈들이다!"라고 호통치며 일제에 빌붙은 불교계 지도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문학적 유산과 영향

한용운의 시는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님의 침묵》은 한국 현대시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의 시에 담긴 민족적 비애와 희망의 메시지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의 시는 단순한 문학적 성취를 넘어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종교적 유산과 불교 개혁

한용운은 불교의 개혁과 현실 참여를 통해 조선 불교의 근대화를 이끈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불교 개혁 사상은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체계적으로 제시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불교의 발전 방향에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특히 그가 주장한 불교의 사회적 역할과 현실 참여는 현대 한국 불교의 중요한 지향점이 되었다.

결론

한용운은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로서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며 한국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불교의 개혁과 현실 참여를 통해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으며, 3·1 운동의 주도적 인물로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또한 시인으로서 《님의 침묵》을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그의 시에 담긴 민족적 비애와 희망의 메시지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한용운의 삶과 사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성, 그리고 사회적 책임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의 비타협적인 독립 정신과 불교적 평등 사상, 그리고 문학을 통한 민족 정신의 고양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로 남아있다. 한용운은 단순히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등불과 같은 존재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