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무용가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세계 최고의 남성 발레 무용수이자, 발레의 경계를 넘어 현대무용, 영화, 연극까지 아우르며 활동한 다재다능한 예술가입니다. 구소련에서 태어나 자유를 찾아 서방으로 망명한 그의 삶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창작의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무용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뉴욕 타임즈의 저명한 평론가 클라이브 반스는 그를 "내가 이제까지 본 무용수 중 가장 완벽한 무용수"라고 극찬했습니다.
출생과 성장 배경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바리시니코프는 1948년 1월 27일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러시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구소련 시절 리가의 군사학교에서 근무하는 소련군 대령이었으며, 바리시니코프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훗날 뉴욕 타임즈 인터뷰에서 아버지에 대해 "그다지 유쾌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회상했지만, 나중에 아버지의 군인 특유의 습관과 매너리즘을 자신의 연기 해석에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바리시니코프의 어린 시절은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을 겪었으며, 이러한 상실감은 그가 발레에 몰입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발레를 시작한 그에게 춤은 단순한 예술 활동을 넘어 불행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발레 교육과 초기 경력
바리시니코프는 12세에 발레를 시작했으며, 리가에서 초기 발레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뛰어난 재능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1963년 16세의 나이에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문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Vaganova Choreographic Institute)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발레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바가노바 아카데미는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부속 학교로, 안나 파블로바, 바슬라프 니진스키, 조지 발란신 등 발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용가들을 배출한 세계 최고 수준의 발레 학교였습니다.
바가노바 아카데미에서 바리시니코프는 저명한 안무가이자 교사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푸시킨은 루돌프 누레예프를 가르친 것으로도 유명한 교사였으며, 바리시니코프의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바리시니코프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1964년 불가리아의 바르나 국제 발레 콩쿠르 주니어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며 천재성을 일찍 드러냈습니다. 1966년에는 바르나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다시 금메달을 받았고, 1969년에는 모스크바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도 금메달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키로프 발레단 시절과 국제적 명성
1967년 바리시니코프는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키로프 발레단에 입단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통상적인 군무 무용수로서의 수습 기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솔리스트로 발레단에 합류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뛰어난 실력이 이미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1969년에는 수석 무용수로 승진하여 키로프 발레단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키로프 발레단 시절 바리시니코프는 레오니드 야콥슨이 그를 위해 특별히 안무한 '베스트리스(Vestris)'(1969)와 '고리안카(Gorianka)'(1968) 등의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습니다. 특히 '베스트리스'는 모스크바 국제 발레 콩쿠르 우승작으로, 바리시니코프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는 또한 '지젤'의 알브레히트 역으로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170cm 미만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바리시니코프는 탁월한 점프력과 회전 기술, 그리고 어떤 캐릭터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표현력으로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무대에까지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의 점프는 자신의 키만큼 높이 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단단한 체격과 정확한 턴 구사 능력은 발레 테크닉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1974년 망명과 자유를 향한 선택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1974년, 26세의 바리시니코프는 예술적 자유를 찾아 서방으로 망명하는 극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1974년 6월 29일, 키로프 발레단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에서 순회 공연을 하던 중, 바리시니코프는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KGB 요원들을 따돌리고 망명을 감행했습니다. 그는 가짜 흔적을 남기고 미리 대기시켜 놓은 자동차를 타고 사라졌으며, 이 과정은 마치 추리소설과 같았습니다.
바리시니코프는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예술적인 이유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레닌그라드에서 이미 유명인사이자 성공한 예술가였지만, 소련의 엄격한 예술 통제 속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다양하고 자유로운 발레를 할 수 없었습니다. 소련에서는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서방의 발레 작품을 공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창작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더 자유롭고 현대적인, 소련스럽지 않은 발레를 원했으며, 이러한 갈망이 결국 망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시인 이오시프 브로츠키는 "바리시니코프가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았다면 러시아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970년대 소련에서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창작의 자유 부재로 인한 좌절감으로 술에 빠져 시와 음악, 연출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리시니코프는 50년 후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자유를 위해 소련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먹고 결행했다"며 "스스로 자유세계를 택한 만큼 나는 이탈자(defector)가 아닌 선택자(selector)"라고 강조했습니다.
미국에서의 활동 -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캐나다에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바리시니코프는 곧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 예술계는 그를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망명 직후인 1974년 7월부터 바리시니코프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re, ABT)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ABT는 당시 이미 같은 키로프 발레단 출신으로 먼저 망명했던 나탈리아 마카로바가 활약하고 있었으며, 바리시니코프는 마카로바와 함께 화려한 파트너십을 이루며 관객들을 매료시켰습니다.
바리시니코프의 첫 파트너는 뉴욕 시티 발레단 출신의 겔시 커클랜드였습니다. 162cm의 키를 가진 겔시는 171cm인 바리시니코프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으며, 두 사람은 짧은 연습 기간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데뷔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평론가들은 이들을 "인간 세계의 젊은이라기보다는 그림에 나오는 요정들"이라고 극찬했습니다.
ABT에서 바리시니코프는 '돈키호테', '백조의 호수', '지젤', '레이몬다' 등 고전 발레의 주역을 맡으며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특히 돈키호테의 바질 역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스페인 출신의 안헬 코렐라와 아르헨티나 출신의 훌리오 보카 등 후배 무용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뉴욕 시티 발레단과 조지 발란신
1978년 바리시니코프는 20세기 최고의 안무가 중 한 명인 조지 발란신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뉴욕 시티 발레단(New York City Ballet)으로 이적했습니다. 발란신의 신고전주의 러시아 발레 스타일을 배우기 위해 주역 무용수로 1시즌 동안 활동한 것입니다. 뉴욕 시티 발레단에서 바리시니코프는 발란신과 제롬 로빈스의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예술적 지평을 넓혔습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발란신조차도 바리시니코프에게는 기술이나 스타일을 전수해주는 등 그의 실력을 높이 샀다고 합니다. 발란신과의 작업은 바리시니코프에게 고전 발레를 넘어선 새로운 움직임과 표현의 세계를 열어주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현대무용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예술감독 시절
1980년 바리시니코프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로 돌아와 예술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1989년까지 약 10년간 예술감독을 맡으며 ABT를 세계 최고의 발레단 중 하나로 이끌었습니다. 예술감독으로서 바리시니코프는 새로운 세대의 무용수들과 안무가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소개했습니다.
예술감독 시절 그는 '백조의 호수'와 '신데렐라'를 새로 안무하는 등 안무가로서의 역량도 발휘했습니다. 또한 고전 발레뿐만 아니라 현대 무용 작품들도 레퍼토리에 포함시키며 발레단의 예술적 다양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바리시니코프 체제 하에서 ABT는 전성기를 구가하며 미국 발레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화이트 오크 댄스 프로젝트와 현대무용으로의 전환
1990년 42세의 바리시니코프는 은퇴를 고려할 나이에 놀랍게도 현대무용단을 창단했습니다. 안무가 마크 모리스와 의기투합하여 창단한 '화이트 오크 댄스 프로젝트(White Oak Dance Project)'는 바리시니코프가 현역 무용수로 남기 위한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화이트 오크 댄스 프로젝트는 레퍼토리 무용단으로, 마사 그레이엄, 머스 커닝햄, 모리스 베자르, 폴 테일러, 트리샤 브라운, 트와일라 타프 등 세계 정상급 현대무용 안무가들로부터 40여 편의 작품을 위촉받았습니다. 창단 이후 2002년까지 이 무용단은 30여 개국을 순회하며 600회가 넘는 공연을 가졌습니다. 2001년에는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첫 내한 공연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무용평론가 로잘린 술커스는 "깎아낸 듯 분명한 초점과 명료함을 지녔고, 또 지적인 바리시니코프의 무용은 현대무용에 대한 통념을 초월한다"고 평가했습니다. 화이트 오크 댄스 프로젝트를 통해 바리시니코프는 고전 발레와 현대무용 사이의 '백년간의 춤 전쟁'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영화와 TV 활동
바리시니코프는 무용수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영화와 TV에서도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습니다. 1977년 영화 데뷔작인 '터닝 포인트(The Turning Point)'에서 망명한 러시아 무용수 유리 코페이킨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과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무려 11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바리시니코프는 이탈리아의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에서 "영화 연기와 무용 예술에 기여한 공로"로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1985년에는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백야(White Nights)'에 출연하여 자신의 실제 삶과 비슷한 망명 러시아 발레리노 역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는 그레고리 하인즈, 헬렌 미렌, 이사벨라 로셀리니 등과 함께 출연했으며, 바리시니코프와 하인즈의 춤 대결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노래 '야생마(Capricious Horses)'가 흐르는 가운데 바리시니코프가 온몸으로 호소하며 추던 춤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TV에서는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의 마지막 시즌에 주인공 캐리의 러시아인 남자친구 알렉산드르 페트로프스키 역으로 출연하여 한 번도 발레를 본 적 없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도 그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 배역은 주연 배우이자 제작자인 세라 제시카 파커의 아이디어로 캐스팅되었으며, 당시 파커는 "그냥 미친 척 하고 전화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연락했다가 바리시니코프가 쾌히 승낙하여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지젤(Dancers)'(1987), 스티븐 버코프가 연출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Metamorphosis)' 등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도 출연하며 연기자로서의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바리시니코프 아트센터
2005년 바리시니코프는 뉴욕에 바리시니코프 아트센터(Baryshnikov Arts Center, BAC)를 설립했습니다. 맨해튼 미드타운 허드슨 야드 지역에 위치한 22,000평방피트 규모의 최첨단 시설인 이 센터는 전 세계의 다학제적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계된 창작 공간입니다.
바리시니코프 아트센터는 무용, 연극, 음악, 시각예술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에게 창작 레지던시, 공연 공간, 전시 공간을 제공하며, 예술적 실험과 협업을 장려합니다. 이 센터는 바리시니코프가 평생 추구해온 예술적 자유와 창의성의 가치를 실현하는 장소로, 젊은 예술가들을 육성하고 새로운 예술 작품의 탄생을 돕고 있습니다.
수상 경력과 업적
바리시니코프는 평생에 걸쳐 수많은 상과 영예를 받았습니다. 2000년에는 미국 공연 예술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케네디 센터 공로상(Kennedy Center Honors)을 수상했습니다. 이 상은 미국의 공연 예술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에게 수여되는 평생 공로상으로, 매년 12월 대통령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시상식이 열립니다.
또한 그는 국가 예술 훈장(National Medal of Arts), 커먼웰스 상(Commonwealth Award), 제롬 로빈스 상(Jerome Robbins Award), 빌첵 상(Vilcek Award) 등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2010년에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등급을 받았으며, 2017년에는 일본의 권위 있는 프라에미움 임페리알레 국제예술상(Praemium Imperiale International Arts Award) 연극/영화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2017년 라트비아 공화국은 바리시니코프의 특별한 공로를 인정하여 시민권을 수여했습니다. 이는 1990년 라트비아가 독립을 선언한 이후 바리시니코프가 자주 조국을 방문하며 문화 교류에 기여한 것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개인 생활
바리시니코프는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아카데미상 수상 배우인 제시카 랭과 연인 관계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1981년 딸 슈라 바리시니코프가 태어났습니다. 슈라는 현재 무용가 겸 배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86년부터는 전 발레리나인 리사 라인하트와 관계를 맺어 1989년 아들 피터, 1992년 딸 안나, 1994년 딸 소피아를 낳았습니다. 안나 바리시니코프도 아버지를 닮아 배우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4년 영화 '러브 라이즈 블리딩(Love Lies Bleeding)'에 출연하여 한국에 내한하기도 했습니다.
1986년 바리시니코프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망명 이후 한 번도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라트비아계 미국인으로서 뉴욕에 거주하며 예술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술적 특징과 영향
바리시니코프의 가장 큰 특징은 고난도의 테크닉과 탁월한 표현력의 완벽한 조화였습니다. 170cm 미만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키만큼 높이 뛰는 놀라운 점프력과 정확한 회전 기술을 자랑했습니다. 그의 움직임은 우아한 왕자부터 악랄한 악당까지 어떤 캐릭터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뛰어난 연기력으로 뒷받침되었습니다.
바리시니코프는 고전 발레에서 현대무용으로, 무대에서 영화와 TV로, 무용수에서 안무가, 예술감독, 배우로 끊임없이 변신하며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고전 발레에서 현대무용, 영화에서 브로드웨이 쇼까지 거침없는 활동을 보여준 그는 춤을 담은 두 편의 사진집과 전시회를 가진 사진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예술 세계는 "일하는 것이 나를 살게 한다"는 그의 말처럼, 평생을 쉬지 않고 달리며 완전한 자유를 갈망하는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무대에 서며 현역으로 활동하는 그의 열정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결론 - 영원한 예술의 자유를 향한 여정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단순히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노를 넘어, 예술적 자유와 창의성을 평생 추구한 진정한 예술가입니다. 자유를 찾아 조국을 떠나 서방으로 망명한 그의 용기,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개척 정신, 그리고 젊은 예술가들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헌신은 오늘날까지도 예술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바리시니코프와 만나는 것은 바로 20세기의 무용 역사와 조우하는 것"이라는 평가처럼, 그의 삶과 예술은 발레와 무용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77세가 된 지금도 여전히 예술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바리시니코프는 자유와 열정으로 점철된 그의 예술 인생을 통해, 진정한 예술가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