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서사극의 걸작

by NewWinds 2025. 9. 26.

작품 개요와 창작 배경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희곡 『사천의 선인(Der gute Mensch von Sezuan)』은 1938년부터 1941년 사이에 집필된 비유담 형식의 서사극입니다. 루트 베를라우와 마르가레테 슈테핀과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 이 작품은 1943년 2월 4일 취리히 샤우슈필하우스에서 초연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한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없는 문제를 제시하였습니다. 작품의 배경이 된 사천(四川)은 중국의 실제 지역이 아닌,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상징적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줄거리와 주요 등장인물

기본 줄거리

이야기는 선인(善人)을 찾기 위해 여행하는 세 명의 신들로 시작됩니다. 물장수 왕은 이들에게 숙소를 구해주려 애쓰지만 가는 집마다 거절당합니다. 마침내 창녀인 셴테가 기꺼이 자신의 집을 숙소로 제공하며, 신들은 감사의 표시로 그녀에게 은화 천 냥을 건네줍니다.

 

셴테는 이 돈으로 작은 담배가게를 마련하지만, 계속 몰려드는 빈민들의 요구에 시달리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교활한 사촌오빠 슈이타로 변장하여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후 그녀는 비행사 양순과 사랑에 빠지지만, 양순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단지 이용할 뿐입니다.

 

임신한 셴테는 태어날 아이를 위해 다시 슈이타로 변장하고 담배공장을 차립니다. 그러나 셴테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슈이타가 그녀를 살해했다고 의심하여 법정에 세우게 됩니다. 재판관으로 나온 신들 앞에서 슈이타는 자신이 셴테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주요 등장인물

셴테(Shen Te)는 착한 심성을 가진 사천의 선인으로, 양순을 사랑하며 그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타인에 대한 헌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며, "베푸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슈이타(Shui Ta)는 셴테의 사촌오빠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합리적이며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실제로는 셴테가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분신으로, "담배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업수완이 뛰어납니다.

 

양순(Yang Sun)은 실업자이자 공장의 감독관으로 비행사로 취직하길 바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셴테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합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과 소격효과

서사극의 특징

브레히트는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 형식에 반기를 든 서사극을 창시했습니다. 전통적 연극이 관객의 감정이입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추구했다면, 서사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로부터 비판적인 거리를 갖게 하여 현실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합니다.

 

『사천의 선인』은 교훈적인 비유담, 장면들의 개방형식, 열린 결말, 소격효과 등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 요소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모범적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소격효과의 구현

브레히트가 창안한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는 관객의 몰입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관객과 작품 사이의 거리를 유지시키는 기법입니다. 이는 '생소화 효과', '낯설게하기 효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단순화되고, 신, 아내, 할머니, 경찰 등 사회적 명칭으로 불립니다. 또한 노래들은 사건 진행을 해설하는 기능 외에 비유적 성격을 띠며, 에필로그에서는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어 선한 인간이 행복해지는 결말을 찾아볼 것을 요청합니다.

작품의 주제 의식과 사회적 메시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브레히트는 이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선하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제시했습니다. 셴테의 사례를 통해 모순된 현실 사회에서 의식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셴테는 "다른 사람에게 착하면서 저 자신에게도 착할 수는 없었다"라고 처절히 고백합니다. 그녀가 살아가는 사천은 가난과 범죄가 가득하고, 사람들 간에 신의가 없으며, 불의를 보고도 자신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회피하는 곳입니다.

선의 개념과 사회적 의미

작품은 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계에서 인간이 파멸하지 않고 진실로 선하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가장 논리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신들이 셴테에게 요구하는 "선하기 위해 동시에 악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회"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결말 부분에서 재판의 대상은 인간이 아닌 사회질서 자체가 됩니다. 이는 개인의 도덕적 선택이 아닌 사회 구조의 변화가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동양 문화와 철학의 융합

브레히트는 『사천의 선인』에서 동양 문학과 철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특히 백거이의 시 "新制綾襖成感而有詠(신제릉오성감이유영)"를 작품 중 슈이타의 대사에 인용하여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성찰을 담았습니다.

 

또한 산스크리트극 형식과 중국시, 철학을 총동원하여 동서양 문화, 철학, 문학과 연극론을 총체적으로 융합시켜 완성한 작품입니다.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과 세 천사 이야기를 기본 모티브로 하여 동양적인 옷을 입힌 것이 바로 이 작품의 특징입니다.

작품의 현대적 의미와 영향

지속가능한 선행의 모델

셴테가 만들어낸 슈이타는 그녀가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선행 모델로 볼 수 있습니다. 슈이타는 냉정하지만 악행을 저지르지 않으며, 담배공장을 차려 사람들이 일하고 스스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이는 무조건적인 베품보다는 구조적 해결책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셴테가 빈자들에게 소소한 것들을 무조건적으로 내주었다면, 슈이타는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현대사회에 던지는 질문

브레히트가 극을 집필했던 1930년대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착하면 손해 본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작품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세상은 변화되어야만 하는가.

 

모든 등장인물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살아가는 점에서 진정한 선인은 작품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관객은 현실 속에서 어떤 사람이 진정한 선인인지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됩니다.

작품의 예술적 성취와 평가

『사천의 선인』은 브레히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며, 오랜 기간동안 수많은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쳐 완성된 희곡입니다. 총 10막과 서막, 에필로그 그리고 7개의 막간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막과 5막 다음에 오는 막간극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장수 왕이 꿈속에서 세 신들과 만나는 막간극입니다.

 

브레히트는 사회적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고, 예술을 통해 사회의 개혁을 일으키려는 사회적 의식을 가진 작가였습니다. 그는 사회개혁의 실현을 위해 연극에서 관객의 비판적 태도를 요구했고 소격기법을 통하여 관객의 능동성과 적극적 실천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브레히트의 작가의식은 『사천의 선인』에서 잘 드러나며, 모순된 현실을 변화하고 개선하고자 한 그의 사회참여적 작가의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품은 현재까지도 세계 각국에서 공연되며 관객들에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