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사마천 :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이자 기전체 역사서 '사기(史記)'의 저자로 동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

by NewWinds 2025. 10. 23.

동양 역사학의 아버지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경~기원전 86년경)은 중국 전한(前漢) 시대 한무제 때의 역사가로, '사기(史記)'를 저술하여 동양 역사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입니다. 그는 자가 자장(子長)이며, 산시성 용문(현재의 위남시 한청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마천은 동양 최고의 역사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집니다. 서양의 헤로도토스와 함께 역사학계에서 가장 찬사받는 인물이며, 동양에서 역사라는 학문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관 집안의 후예

사마천의 가문은 기원전 9세기 무렵부터 주 왕실에서 천문, 제사, 율력을 관장하는 태사령 직을 대대로 세습해온 사관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도 한무제 때 태사령으로 재직하며 천문학과 역학은 물론 도가까지 섭렵한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사마담은 옛 역사를 정확하게 밝혀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제자백가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여섯 학파인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의 장단점을 논한 '논육가요지'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사마천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 아래 성장했습니다. 10살 때부터 고대 경전을 암송하기 시작했으며, 열일곱 즈음에는 대유학자 동중서의 문하생이 되어 '춘추' 등의 역사철학을 배웠습니다. 그는 고대부터 한(漢) 대에 이르기까지 학술사상과 흥망성쇠의 역사를 깊이 파악했고, 천문과 지리, 역수에도 상당한 지식을 갖추었습니다.

천하를 주유하며 견문을 넓히다

사마천의 삶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청년 시절의 광범위한 여행입니다. 20대부터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주요 유적지를 관찰하고 책자와 전설, 경험담 등 사료를 폭넓게 수집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과 회하를 여행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 임금의 동굴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절강성과 구의산 등을 보았습니다. 그 뒤 원수·상수 등의 강을 내려갔다가 북쪽으로 문수·사수를 건넜습니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도시에서 학업도 하고 공자의 유풍도 관찰했습니다. 이러한 유람을 통해 각 지방의 풍속과 풍습을 살피고 역사적 인물들의 기이한 소문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자료들을 수집했습니다.

태사령 계승과 아버지의 유언

사마천이 35살이던 기원전 110년, 한무제는 한왕실의 봉선례를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태사령이면서도 이 행사에 참가를 허가받지 못한 아버지 사마담은 분노와 실의로 중병을 얻어 죽게 됩니다. 사마담은 임종 직전 아들에게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공자 이후 4백여 년의 혼란기를 거치며 기록다운 기록이 끊겨 버렸다. 이제 우리 한나라가 다시 천하를 통일하고 전성기로 접어들었는데, 이렇게 의미 있는 시절에 훌륭한 군왕과 충신 그리고 열사와 의인들을 내가 태사령으로서 기록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무척 괴롭다. 너는 반드시 기록하도록 하여라"라는 당부였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들은 지 3년 뒤인 기원전 108년, 38세의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마천은 황실과 조정의 석실금궤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수많은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했습니다. 국가 도서관의 각종 서적 및 파일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유고를 기초로 사기 저술에 착수했습니다.

이릉 변호 사건과 궁형의 치욕

사마천의 삶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그를 위대하게 만든 사건이 바로 '이릉의 화'입니다. 기원전 99년,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이릉은 보병 5000명을 이끌고 흉노의 수만 기병을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나, 장수들 사이의 알력과 충돌로 적진 깊숙한 곳에서 고립되었고, 화살과 군량미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중과부적으로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보고를 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를 열었습니다. 신하들은 모두 이릉을 비난하고 이릉의 가족 모두를 능지처참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맹을 찬양하고 두둔했습니다. "이릉은 흉노 토벌에서 패전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5천의 군사로 8만의 적군을 상대했고, 화살과 군량미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음에도 분투했습니다. 살아남은 부하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그들의 목숨을 살리려 투항한 것일 뿐, 이는 단순히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함이 아니라 지금 목숨을 지켜 후에 기회를 얻어 흉노를 멸하고자 한 것입니다"라고 변호했습니다.

사마천의 변호는 당시 전군을 지휘한 이광리 대장군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광리는 한 무제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 이부인의 오빠였습니다. 다혈질의 강성 군주 한 무제는 사마천을 당장 처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시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는데, 50만 전이라는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 벌금 액수는 정병 5천 명을 1년 동안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 총합과 맞먹는 금액으로, 태사령의 녹봉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죽음보다 무거운 사명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습니다. 궁형은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치욕스러운 형벌로, 살아남을 확률도 적었으며 구차하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것이 더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인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만일 제가 법의 심판을 받아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마치 아홉 마리의 소 중에 털 하나가 없어진 것처럼 하찮을 텐데 땅강아지나 개미의 죽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며 구우일모(九牛一毛)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사람은 본디 한번은 죽게 마련인데, 어떤 죽음은 태산처럼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 깃털보다 가볍습니다. 추구했던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3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3년 동안 사마천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고, 이 과정에서 현상을 뒤집어서 볼 수 있는 눈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마천은 한 고조 유방부터 자신이 섬긴 한 무제까지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습니다.

발분저술(發憤著述)의 결정체, 사기

사마천은 역사 집필에 혼신의 정열을 기울여 마침내 12본기, 10표, 8서, 30세가, 70열전 등 모두 130편, 52만 6500자로 이뤄진 '사기'를 완성했습니다.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90년까지 약 14년 동안 집필에 매달린 결과였습니다. '사기'는 중국 신화시대의 황제 때부터 한나라 무제까지의 약 3000년의 시간을 담아낸 역사서입니다.

'사기'의 집필 목적은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고자(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원대한 이상과 포부는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과거와 현재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총망라하여 서술함으로써 자신 또한 이 분야에서 경지를 이루겠다는 야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기'는 조정의 명을 받아 집필한 관찬(官撰) 역사서가 아닌 사마천 스스로 발분(發憤)하여 집필한 사찬(私撰)입니다. 이 점은 조정의 간섭에서 벗어나 사마천의 개인적 사관이 좀 더 직접적으로 책에 녹아들 수 있게 했고 당대의 제왕이었던 한 무제에 대한 날 선 비판을 가능케 했습니다.

사마천은 '보임안서'에서 "정말로 만일 이 역사서를 완성하여 이것을 명산에 비장해서 영원히 전하고, 또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천하의 대도시에 유포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때야말로 내가 받았던 치욕은 보상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이 몸이 여덟으로 찢긴다 하여도 결코 후회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사기' 자체가 사마천이 하는 복수라는 의미였습니다. 사마천이 행한 것은 고품격의 문화 복수이며, 자신의 한을 '사기' 곳곳에 은유와 비유를 담아서 적어 두었습니다.

기전체(紀傳體)의 창안

사마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기전체(紀傳體)라는 역사 서술 체제를 만든 것입니다. '사기'는 본기(本紀) 12편, 표(表) 10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기는 황제들의 사적인 부분으로, 제왕들의 생애와 업적을 중심으로 한 기록입니다. 사마천 이전에도 공자가 쓴 편년체(編年體) '춘추'나 좌구명이 쓴 국별체(國別體) '국어' 같은 역사서가 있었지만, 사마천은 편년체나 국별체로는 자신이 나타내려는 뜻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기전체라는 새로운 사서 형식을 만들었습니다.

표는 연대기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역사적 사건들의 시간적 순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줍니다. 서는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다룬 부문별 문화사로, 예서, 악서, 율서(병법), 역서(율력변천), 천관서(천문), 봉선서(의례), 하거서(토목), 평준서(경제정책) 등 8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가는 왕이나 공신들의 가계와 그들의 행적을 기록한 부분으로, 한나라의 봉건제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특히 공자세가와 진섭세가가 포함되어 있는데, 공자가 후대에 끼친 학문적 업적과 진섭의 농민 봉기가 결국 진왕조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입니다.

열전은 70권으로 '사기'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기와 세가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들의 전기를 다루고 있으며, 다양한 인물들의 생애를 상세히 기록하여 그들의 업적과 성격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여색이나 남색을 통해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환관과 외척들에 관한 기록(영행열전), 보잘것없는 외모를 지녔지만 기지와 해학이 넘쳤던 인물들에 관한 기록(골계열전), 포악한 관리들에 관한 기록(혹리열전), 자객과 유협, 화식 열전 등 정사와는 거리가 먼 야사의 인물들조차 아무 거리낌 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는 혁신적인 시각

사마천이 기전체 사서를 고안한 이유는 중국사의 시조부터 시작하는 계통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기'는 한나라의 역사서가 아니라 천하가 어떻게 시작해서 한나라까지 왔는지 서술한 일종의 천하사입니다. '사기'는 중국 최초의 중국민족사, 즉 중국한족사입니다. 기전체는 황제의 사적인 본기가 표·서·세가·열전의 내용까지 규정짓는 사서로, 황제의 사적이 중심 기둥이 되어 우산을 펼치면 그 우산 아래 세가·열전·지·표 등이 종적, 횡적 연결관계를 갖고 움직이는 체제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역사변역사상(歷史變易思想)'과 '대일통사상(大一統思想)'이 담겨 있습니다. 역사변역사상이란 천지자연과 인간사회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사마천은 "사물이 성하면 쇠하니 진실로 그것이 변화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역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기본이며 그런 변화하는 양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역사가 본연의 자세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한 사마천은 화이불분(華夷不分), 즉 중원과 이족을 구분 짓지 않는 열린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기 세가'의 첫 편인 '오태백 세가'는 오나라가 주나라 태왕의 아들인 태백의 후예이고 월나라는 우임금의 후예이며, 흉노의 선조는 황제의 후예라는 시각으로 우월론적 중화주의를 부정하는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사마천은 전통적인 천명론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며 인간에게 집중했습니다. 그는 역사를 연구하며 인간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고,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역사에서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는 '사기'의 구성을 보더라도 알 수 있으며, 기존의 왕조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문학작품으로서의 사기

'사기'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닌 태고부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한무제까지의 오만군상의 인간상과 사마천 본인의 개인적 고뇌가 담긴 작품입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양계초는 '사기'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사기'는 일종의 '분노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감정의 격동이 전편에 흘러넘칩니다. 초기에는 '비방하는 책'으로 낙인찍히기까지 했으나, 문학을 대하는 감성과 시각이 달라지면서 당-송을 거쳐 점차로 명성이 높아졌고 명대에 이르러 위대한 작품으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사기'의 언어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민요와 속담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마천은 민요, 속담을 많이 이용함으로써 '사기'의 언어를 풍부히 하고 다채롭게 했을 뿐 아니라 인민들의 사상 감정을 직접 반영하고 작자의 애증을 거기에 기탁했습니다. 또한 사마천은 강한 경향성을 보여주며 "착한 것을 착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며, 어진 것을 어질다 하고 불초한 것을 불초하다 한다"는 표폄(褒貶) 기능을 중시했습니다.

동양 역사학에 미친 영향

사마천이 창안한 역사 서술체제인 기전체는 중국은 물론 동양 한자 문화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우리 역사서들은 직접 영향을 받았습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 한국의 정사들이 기전체 형식을 따랐으며, 이는 동아시아 역사 서술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사기'는 중국 이십사사(二十四史)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힙니다. 이십사사는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부터 청나라 건륭제의 명에 의해 편찬된 '명사'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공인된 정사 24권을 총칭하는데, '사기'는 그 첫 번째 역사서로서 후대 정사 편찬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사기'는 기존의 사관문화 전통을 결산하면서 단순한 중복이나 모방이 아닌 당대의 현실적 요구에 근거해서 사관문화 전통을 취사선택했습니다. 사마천은 과거 몇 천년의 사관문화에 대한 종합을 시도했고, 이로써 기존 문화학술에 대한 체계적이고 대대적인 정합을 이루어냈습니다. 민족문화의 정형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기'는 중화민족문화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사마천은 동시대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진시황이 전국 각지에 남긴 5개의 각석(刻石)을 비롯해 한나라의 황제들이 그 황자들에게 남긴 기록들을 수집하고 보존했습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 처음으로 기록된 본격적인 역사서라는 점에서 '사기'는 분서갱유와 밀접한 관련을 지닙니다.

불후의 이름을 남기다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을 끝내고 2년 후에 사망했습니다. 기원전 90년경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마천 혼자 썼는데도 정사로 분류하는 까닭은 객관적 입장에서 쓰였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은 부친 사마담의 유언대로 춘추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수모와 분노를 감수하며 뒤로한 채 오직 살아남아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규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지언(一家之言)을 이룩하려는 신념으로 불후의 대작 역사서를 남겼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매끄러운 필체의 역사서로서 역사의식을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소중한 가치를 지녀 지금 시대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고도 살아남아 역사서를 완성한 사마천의 불굴의 의지는, 죽음의 무게는 생전에 이룬 것으로 결정된다는 그의 신념을 증명했습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가치 없는 죽음이었고, 땅강아지나 개미의 죽음처럼 치부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끝내 살아서 저술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사마천은 동양 역사학의 시조이자 역사라는 학문을 정립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사기'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애독되고 있으며, 사마천의 복수는 드라마틱하게 성공했습니다. 사마천은 머리와 마음으로 역사를 낳은 진정한 '역사의 아버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