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비 왕조는 1501년부터 1736년까지 존속한 근세 페르시아의 대제국으로, 현대 이란 역사의 출발점이자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를 만들어낸 왕조였다. 수피즘 종단에서 출발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광대한 영토를 통일한 이 왕조는 시아파 12이맘파를 국교로 확립함으로써 순니파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종교적·정치적 대안을 제시했으며, 사산 제국 이후 약 천 년 만에 이란 민족의 자주적 통치를 회복했다. 특히 아바스 1세 시대에는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번영의 정점에 도달하여 이스파한을 "세계의 절반"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시켰고,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서 국제적 위상을 확립했다.
사파비 왕조의 기원과 건국 과정
사파비 왕조의 기원은 13세기 아르다빌 지역에서 시작된 수피즘 종교 교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셰이크 사피 알-딘(1252-1334)이 설립한 사파비야 교단은 처음에는 순니파 성향이었으나 후에 시아파로 전환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사파비 집안은 쿠르드계 출신으로 여겨지며,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집안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시아파 무사 알-카짐의 후손이라 주장했으나 이는 참칭으로 보인다.
15세기 후반 백양조(아크코윤루) 시대에 시아파 세력이 증대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조정은 사파비 가문을 아제르바이잔 아르다빌에서 축출했다. 이후 사파비 집안의 주나이드는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의 투르크멘 부족들 사이에서 포교 활동을 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키질바시라 불리는 전사 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이 이름은 그들이 12이맘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착용한 붉은 터번에서 유래했다.
1500년 12세의 이스마일이 아제르바이잔 지방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옛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차 사파비 왕조의 주축이 될 키질바시 7부족인 샤믈루, 우스타즐루, 루믈루, 아프샤르, 카자르, 테켈루, 줄카디르가 합류했다. 같은 해 이스마일은 아버지의 원수인 쉬르반샤 왕조를 공격하여 그들의 군주를 살해하고 바쿠를 점령하며 쉬르반샤 왕조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1501년 이스마일은 사루르 전투에서 아크코윤루군을 물리치고 타브리즈를 함락시켰다. 이제 이스마일은 타브리즈에서 정식으로 즉위하고 사파비 왕조를 건국했다. 그는 자신의 칭호를 이슬람식 술탄이나 몽골식 칸이 아니라 페르시아식 샤로 정하면서 옛 페르시아 제국의 전통 계승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1502년 아크코윤루에게 다시 승리를 거두자 이제는 이란의 샤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구조와 통치 체제의 발전
사파비 왕조의 정치 구조는 초기 신정체제에서 출발하여 점차 중앙집권적 관료제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샤가 성속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신정체제였으며, 성직자와 관료, 군이 3대 권력집단으로 샤를 보좌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샤는 "신의 그림자"라고 불리며 종교적 권위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키질바시 부족 지도자들은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토지와 권력을 받았지만, 이런 구조는 종종 중앙 권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토지 제도에서는 국유지인 디반과 왕실 소유의 카사가 점차 증가했으며, 키질바시 군벌들도 많은 봉토를 받았다. 그 대신 국유지와 왕실토지 중 일부를 관료에게 급료 대신 하사하되 세습은 허용하지 않고 환수하는 티율 제도를 도입했다.
압바스 1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키질바시의 권력을 줄이고, 대신 굴람이라 불리는 개종한 기독교도 노예 군인들을 중용했다. 이들은 주로 조지아,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샤에게 직접 충성을 바치는 상비군을 형성했다. 또한 고위 성직자들인 울라마와 사이드들도 점차 중용되었는데, 특히 이라크에서 온 시아파 학자들이 중용되었다.
종교적 정체성과 시아파 국교화의 의미
사파비 왕조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시아파 이슬람의 12이맘파를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 종교로 수립한 것이다. 이는 이슬람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이란이 순니파 오스만 제국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종교적 정체성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스마일 1세가 1502년 시아파를 국교로 지정한 것은 단순한 종교적 선택을 넘어서 정치적, 문화적 차별화 전략이었다. 이로써 시아파는 이란을 대표하는 문화적·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 오랜 이민족 통치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이는 652년 아랍족의 침입 이후 약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나 자신들의 왕조를 다시 세우는 것과 맞물려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은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은 1512년 시아파 무슬림들의 발호를 차단하기 위해 사파비에 대항한 전쟁을 선포하고, 자국 영토 내 수천 명의 시아파를 처형하고 강제 이동시켰다. 이는 찰드란 전투로 이어져 "이슬람 세계의 세계대전"이라 불릴 정도의 대규모 종교 전쟁으로 발전했다.
종교 지도자들인 울라마는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들은 법률 해석, 교육, 종교 의식을 담당했고, 점차 정치적 영향력도 키워갔다. 사파비 왕조 후기로 갈수록 울라마의 권력이 강해지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는 후에 이란의 정치 구조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영토 확장과 대외 관계
사파비 제국의 영토는 건국 초기부터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1501년 아제르바이잔과 시르반, 다게스탄 남부, 아르메니아 고원을 장악하면서 건국된 사파비 제국의 영토는 1502년 하마단, 에르주룸, 에르진잔, 1503년 시라즈와 케르만, 1504년 디야르바크르와 나자프, 카르발라, 1508년 반, 1509년 바그다드와 헤라트를 정복함에 따라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1510년에는 호라산을 포함하여 다른 지역들도 정복되었으며, 인접한 조지아의 카르틀리와 카헤티 왕국은 이미 1503년에 사파비 제국에 복속하고 그의 봉신이 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1511년 이스마일 1세는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이끄는 우즈베크인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옥수스 너머 중앙아시아로 멀리 쫒아냈다. 성공적인 정복 활동으로 이스마일 1세는 페르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대군주로 올라섰으며, 그의 제국은 사산 제국의 멸망 이후 가장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으로 성장했다.
절정기에는 오늘날의 이란, 아제르바이잔, 바레인, 아르메니아, 조지아 동부, 러시아를 포함한 북코카서스 일부, 터키, 시리아, 파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을 통치했다. 심지어 일시적이지만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사파비 왕조는 동쪽으로는 우즈베크족과,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지속적인 갈등을 겪었다. 16세기 초 티무르 왕조의 쇠퇴에 편승하여 중앙아시아에서는 우즈베크족이 보하라 한국과 히바 한국을 연이어 세웠다. 사파비 왕조는 정통파인 오스만 투르크와 격렬하게 대립했고, 동북 국경에서도 정통파를 따른 우즈베크족과 싸움을 반복했다.
초기 사파비 왕조는 수니파인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으며, 1524년 수도인 타브리즈가 함락되는 등 오스만 투르크와의 대립은 국가 발전의 장애로 작용했다. 이러한 지속적인 외침은 사파비 왕조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화와 예술의 황금기: 압바스 1세 시대
압바스 1세(재위 1588~1629)는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로, 중앙집권 강화를 통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다. 그는 수도를 카스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겼으며, 이스파한은 그의 통치 아래 "세계의 절반"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하였다. 도시 계획과 건축, 미술, 공예, 직물 산업 등에서 이룬 업적은 이슬람 문화권뿐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된다.
압바스 1세는 상업과 교역에 큰 관심을 가졌고,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사파비 제국을 발전시켰다. 포르투갈 세력을 페르시아만에서 몰아내고, 영국 및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도 교역을 시작하며, 유럽 열강과의 외교·경제적 연계를 확대했다. 또한 그는 군사 개혁을 통해 기존의 키질바시 부족 군벌 대신 노예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상비군을 창설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 이란은 동방견직물, 카펫, 도자기, 사파비 양식의 세밀화(미니어처) 등에서 정점을 찍으며 고유한 예술 문화를 꽃피웠다. 특히 이스파한의 이맘 광장, 샤 모스크, 알리 카푸 궁전 등은 페르시아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쇠퇴와 몰락의 길
압바스 1세 사후, 사파비 왕조는 점차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후계자들은 유약하고 무능한 경우가 많았고, 울라마와 키질바시 세력의 정치 간섭은 심화되었다. 또한 지나치게 보수적인 종교 정책은 사회의 경직성과 폐쇄성을 야기하며, 유럽과의 교역도 점차 줄어들었다.
왕권이 약화되자 지방에서 키질바시 군벌들의 세력이 다시 강해졌고, 중앙정부는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국토 방어력도 약화되어 국경 방어에 실패하였으며, 1722년 아프간계 부족인 길자이 부족의 침공으로 수도 이스파한이 함락되고, 사파비 왕조는 사실상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
1729년에는 나디르 샤가 나타나 아프간 세력을 축출하고 이란을 통일했으며, 1736년 사파비의 마지막 샤인 아바스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아프샤르 왕조를 세움으로써 사파비 왕조는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사파비 왕조의 역사적 의의
사파비 왕조는 단순한 왕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란 역사에서 사파비 왕조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 시아파의 국교화: 사파비 왕조는 12이맘 시아파를 이란의 국교로 삼아, 이란을 순니 중심의 이슬람 세계에서 독자적인 종교 국가로 전환시켰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란이 시아파 국가로 유지되는 결정적 기원이 되었다.
- 민족적 정체성의 회복: 사산 왕조 멸망 이후 1000여 년간 지속된 외세 지배를 종식시키고, 페르시아인 스스로가 세운 왕조를 수립했다. '샤'라는 칭호의 부활은 고대 페르시아의 영광을 현대 이란에 계승시키려는 의지를 상징한다.
- 문화·예술의 부흥: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한 도시 건설, 미술, 건축, 직물, 서예 등은 페르시아 문화를 한층 더 풍부하고 세련되게 발전시켰다. 사파비 양식은 오늘날에도 이란 예술의 전형으로 간주된다.
-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확립: 부족 중심의 권력 구조에서 벗어나,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하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이는 이후 가자르 왕조와 현대 이란 국가 구조의 기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