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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 : 고구려 동명성왕의 왕후이자 백제 시조 온조·비류의 모후로 전해지는 전설적 인물

by NewWinds 2025. 11. 5.

소서노는 고구려 건국 서사와 백제 건국 설화에 모두 등장하는 연결 고리로, 주몽(동명성왕)의 배우자이자 온조·비류의 어머니로 기록됩니다.

개요

소서노(召西奴)는 기원전 66년부터 기원전 6년 2월까지 생존한 것으로 전하며, 백제 시조 전승에서 온조와 비류의 모후로, 고구려 건국 서사에서는 동명성왕의 부인으로 나타납니다.
전승에 따르면 소서노는 지역 유력자 연타발의 딸로, 처음 북부여 왕족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고, 이후 주몽과 재혼해 그의 건국을 도왔다고 전해집니다.
유리(훗날 유리명왕)가 부여에서 고구려로 오자 왕통 문제가 불거졌고, 소서노는 아들들과 함께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정착했다는 서사가 이어집니다.
이 남하 서사는 백제의 성립과 한성기(위례성 중심)의 출발을 설명하는 핵심 내러티브로 기능합니다.
다만 소서노라는 고유명은 사서 원문에 일관되게 확인되지 않으며, 특히 삼국사기 고구려 건국 기사에서는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로만 서술되어 명칭의 확정성에 논란이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역사적 출전

소서노 관련 기본 사료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백제본기와 삼국유사 전거에 근거한 후대 편찬물 및 백과 항목이며, 이들에서 소서노는 온조와 비류의 모후로 전승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 건국 서사는 주몽이 졸본에 정착해 ‘부여왕의 둘째 딸’과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두었다고만 적고 있어, 배우자의 이름이 ‘소서노’였는지는 확정적이지 않습니다.
백제본기 온조조에는 온조 즉위와 위례성 도읍 설정, 말갈·낙랑 대응, 마한과의 관계 등 서술이 이어지며, 모후의 존재는 국가 정통성과 제사의 틀 속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삼국사기 권23 온조왕 13년조에는 “왕모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는 기록이 보존되어 소서노의 사망 연령·시점이 전승됩니다.
요컨대, 소서노는 이름의 실증성에는 논점이 있으나, 모후·왕모로서의 위치와 역할은 백제 시조 전승과 온조대 정치 기사에서 확고히 서술됩니다.

가계와 가족

소서노는 졸본인 연타발의 딸로 전하며, 이는 ‘비류 시조설’을 전하는 삼국사기 주석 전승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정리에서 확인됩니다.
첫 혼인 상대는 북부여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로 알려지며, 이 사이에서 비류와 온조가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우태 사후 소서노는 주몽과 혼인해 그의 건국 과정에 물적·정치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설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온조는 훗날 한성기 백제를 열며 도읍을 위례성에 정하고, 모후와 부친의 제사를 통해 왕실 정통성을 제도화한 것으로 서술됩니다.
이러한 가계 전승은 백제가 고구려·부여 계통성과 지역 유력자 네트워크를 결합해 성립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고구려 건국 참여

설화 전승은 소서노가 졸본 지역의 기반과 재물을 바탕으로 주몽의 세력 확장을 도왔고, 그 결과 기원전 37년의 고구려 성립에 기여했다고 요약합니다.
소서노의 공헌은 ‘총애와 후대’로 표현되거나, 주몽의 주변 인재 흡수·세력 형성의 배경으로 암시됩니다.
이 전승은 실제 정치 행위의 구체성보다 건국 신화가 요구하는 합리화를 의도한 상징 서사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럼에도 모후·왕모로서의 위상은 훗날 온조의 제사 제도와 사당 설치 기사에서 제도적으로 확인됩니다.
따라서 소서노의 ‘건국 기여’는 설화적 맥락과 제도적 흔적이 맞물린 형태로 전승됩니다.

남하와 백제 건국

유리(유리명왕)가 고구려 태자로 책봉되면서 소서노·온조·비류는 남하를 선택하고, 한강 유역 위례성과 미추홀 등지에 정착해 세력 기반을 마련합니다.
온조는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고 방어진지 구축과 대외 외교를 병행하며 초기 백제의 골격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마한과는 초기 우호와 긴장, 항의와 조정이 교차했으며, 이후 병합 서사가 온조대 기사에 배당되어 백제 확장의 분수령처럼 서술됩니다.
이 과정에서 모후의 권위와 귀족 연맹은 온조 정권의 정통성·통치력 정당화에 기여하는 상징 자원으로 작동했습니다.
남하 서사는 결과적으로 백제의 출자를 고구려·부여 계통과 한강 세력의 통합으로 설명하는 근거가 됩니다.
비류와 온조의 분거·경쟁 전승은 백제 시조 전승의 다원성을 드러내며, 모후 소서노의 중핵적 위치를 강조합니다.

온조 재위와 소서노의 흔적

온조 시기에는 말갈·낙랑 대응, 성책 축조와 대외관계 정비, 마한 병합 등 초기 국가 형성의 주요 사건들이 기록됩니다.
온조는 즉위 초 동명성왕과 소서노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이는 왕실 정통성과 모후 권위를 제도적으로 천명한 조치입니다.
사방 강역의 획정과 관부 정비, 민호 편성 등의 기사도 전하나, 절대 연대의 축약·소급 가능성은 학계에서 거듭 지적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온조대 기사에서 보이는 모후의 존재감과 제사의 틀은 백제 정체성 형성에서 소서노가 차지한 상징적 비중을 설명합니다.
위례성 중심의 한성기 성립과 국초 정비 서사 속에서 소서노는 ‘왕모’·‘국모’의 위상으로 회자됩니다.
이는 모계적 상징 자본이 초기 백제의 정치 문화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합니다.

소서노의 죽음과 연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조에는 “왕모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 기사는 소서노의 사망 시점과 연령을 동시에 전하며, 왕실 애장과 천도·수비 논의의 전환점과도 연결되어 읽혀 왔습니다.
사망 기록의 간결함은 왕모·국모로서의 위상을 함축하면서도, 개인 명칭보다 제도·사건 중심으로 서술하는 삼국사기의 체재적 특징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소서노의 사후 흔적은 온조대 정치 기사와 도성·강역 논의의 맥락 속에서 간접적으로 파악됩니다.

시조 논쟁과 다중 전승

백제의 시조를 누구로 보느냐는 전승이 다원적으로 전해지며, 구태·동명·우태·온조·비류 등 복수의 인물이 시조로 지목되는 전거가 병존합니다.
특히 비류 시조설은 연타발·우태·소서노를 매개로 한 계통 전승과 결부되어 지역 연맹의 다핵적 성립을 암시합니다.
온조 시조설은 위례성 도읍, 대외전, 관부 정비 등 정치·제도적 성취와 결부되어 국초의 표준 서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처럼 다중 전승은 백제 형성에 참여한 지배 집단의 복합성과 권위 정당화의 경쟁을 비춰 줍니다.
소서노는 이 전승들의 교차점에 놓인 모후로서, 시조 논쟁을 초월해 정통성 상징의 핵심 고리로 기능합니다.
이는 모후 숭배와 제사의 제도화를 통해 국가 정체성이 구축되는 고대 동아시아 보편의 한 양상을 반영합니다.

건국 연대와 고고학 쟁점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을 기원전 18년으로 배당하나, 고고학 성과는 토기·성곽 자료 등을 근거로 3세기 중후반 성립설을 제기하며 시기 재평가를 촉발했습니다.
풍납토성 등 대규모 성곽의 조영 시기와 한강 유역 백제 토기의 성립 연대는 온조대 기사에 집적된 사건들의 소급·편년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이에 따라 온조 13년 강역 획정, 26·27년 마한 병합 등은 실제 진행 과정을 국초로 압축 기재한 문헌적 구성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문헌과 고고 자료의 긴장은 전승의 상징성과 사실성 사이에서 비판적 독해를 요구하며, 소서노 전승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모후 제사와 정통성 표명이라는 제도적 흔적은 초기 백제 정치 문화의 실제적 요소로 의미를 지닙니다.
결국 소서노는 전승의 층위를 가르는 분석을 통해서도 핵심 상징 자산으로 존속합니다.

이름과 사료 해석

삼국사기 고구려 건국 기사에는 ‘졸본 부여왕의 둘째 딸’만 보일 뿐 ‘소서노’라는 고유명은 확인되지 않아, 명칭의 직접 사료성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다만 백제본기의 왕모 기사, 온조의 제사 기사, 후대 백과 정리에서 소서노 명칭과 모후 전승이 연결되며 역사적 인물상으로 정착합니다.
요컨대 명칭·세부 전기는 설화적 재구성이 섞여 있으나, 모후·왕모의 제도적 위상과 국가 정통성 장치에서의 역할은 핵심 사실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소서노는 ‘개인 전기’보다 ‘정통성의 상징’이라는 차원에서 더 강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명칭 논란과 무관하게 소서노 전승은 백제 시조·가계·제사의 축에서 핵심적입니다.

평가와 의의

소서노는 고구려·백제를 잇는 모후로서 한반도 남북 연계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국가 성립·정통성 서사의 구심점이 됩니다.
온조대의 제사·사당 설치와 왕모 기사 등은 모후의 권위가 국초 통치 정당성의 일부였음을 보여 줍니다.
다원적 시조 전승 속에서도 소서노는 계통 결속의 촉매이자 상징 자산으로 반복 소환됩니다.
명칭의 사료성 논점은 남지만, 전승 전체의 구조에서 소서노의 역할은 핵심적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문헌·고고의 교차 검증 속에서 더욱 정밀한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대중문화 속 소서노

소서노는 드라마 ‘주몽’, ‘근초고왕’, ‘한국사기’ 등에서 재현되며, 모후·정치 파트너·결단의 상징으로 대중적 이미지를 형성했습니다.
이 재현은 설화와 사료의 간극을 연출적으로 메우는 방식이므로, 사료 서술과 구분해 감상하는 비판적 시각이 요구됩니다.
대중 서사는 소서노 전승의 인지도와 상징성을 확산시키는 매개로 기능합니다.

핵심 연표

  • 기원전 37년: 주몽의 고구려 건국 전승, 소서노의 지원 설화 결합.
  • 기원전 18년: 백제 건국 배당(문헌 전승), 도읍 위례성 서사.
  • 기원전 6년(온조 13): 왕모(소서노) 사망, 향년 61.
  • 1세기 전후: 말갈·낙랑 대응과 마한 관계 기사 배당, 제사·사당 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