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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등대 :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 건립된 것

by NewWinds 2025. 5. 29.

알렉산드리아 등대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등대는 사각·팔각·원통형의 세 구획으로 이루어진 100미터가 넘는 높이를 자랑했으며, 낮에는 거울을 통해 태양빛을 반사하고 밤에는 화로의 불빛을 발산하여 지중해 연안의 항로를 밝혀 주었다. 수세기 동안 해양 교역의 요람이자 기술적 혁신의 상징이었던 이 등대는 일련의 지진으로 점차 붕괴되었으나, 1994년 이후 수중 고고학 발굴을 통해 그 실체가 부분적으로 복원되고 있다. 본 보고서는 알렉산드리아 등대의 역사적 배경, 건축 설계와 기술, 기능적 의의, 파괴와 발굴 과정, 문화적 상징성, 그리고 현대적 보존 및 복원 계획을 종합적으로 고찰한다.

역사적 배경

알렉산드리아 등대 건설의 뿌리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자신의 이름을 기념해 건설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의 항구 시설 확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견고히 하고자 항구 입구에 위치한 작은 파로스 섬을 전략적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자신을 ‘소테르(구원자)’라 칭하며 항구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상징적 건축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필요성은 기원전 28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치세 아래 건축가 소스트라투스가 이끄는 공사로 구체화되었다.

 

건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해안선은 복잡한 암초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외국 선박들이 안전하게 항구로 입출항하기 어려웠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수백만 은 탈런트의 예산을 투입해 거대한 등대를 기획했다. 당시 헬레니즘 세계는 수학·기하학·토목기술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 등대는 이러한 기술적 토대를 바탕으로 세부 설계가 진행되었다. 소스트라투스는 자신의 이름을 왕의 업적 아래에 새긴 금속판에 은폐했다는 전설을 남기며 공사의 주체와 예술적 야심을 은밀히 드러냈다.

건축 설계와 공학

구조적 구성: 세 구획 설계

알렉산드리아 등대는 지하 기초부를 포함해 총 세 구획으로 설계되었다. 가장 하부는 정사각형 평면의 기단부로, 각 변의 길이가 30미터에 달했으며 두터운 벽체를 통해 요새와 같은 방어 기능을 수행했다. 그 위로 올라가는 중간부는 팔각형 형태로, 시야를 다각도로 확보하면서 구조적 안정성을 제공했다. 최상부는 원통형 탑으로 설계되어 내부의 화로와 조명장치가 설치되었으며, 외부에는 포세이돈 혹은 헬리오스 신의 동상이 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구획은 모두 안쪽으로 경사 지며 위로 갈수록 직경이 줄어드는 형태로 설계되었다. 이러한 인워딩(inwarding) 설계는 무게 중심이 낮아지는 효과를 내면서도 외부 압력에 대한 저항력을 높였다. 각 구조 경계 부위에는 납결합으로 견고히 마감된 돌다발이 사용되었으며, 외벽은 백색 석회암과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다. 특히 기단부와 중간부 사이에는 아케이드 형태의 개구부가 있어 환기와 채광을 동시에 해결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재료의 선택과 석재 출처

등대에 사용된 주요 재료는 흰색 석회암, 플라 은회색 화강암, 그리고 고대 이집트 남부의 아스완산 화강암이었다. 흰색 석회암은 주변 지역에서 채굴되어 운반되었으며, 부식과 마모에 강한 특성을 지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아스완산 화강암을 왕실 건축물에도 다용하였는데, 이는 등대의 주요 구조 요소에 높은 압축강도를 부여했다. 마감 장식용으로는 그리스 프로콘네소스(Proconnesian) 대리석과 그리스사 Thasian 대리석이 수입되어 사용되었다. 이러한 혼합 재료 전략은 내구성과 미관을 동시에 충족시켰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국제 무역 네트워크가 문화재 건축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내부 통로와 방어 기능

알렉산드리아 등대의 내부에는 선형으로 연결된 나선형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어 무거운 연료나 보급품을 나귀나 수레로 수월하게 운반할 수 있었다. 내부 도로 양옆에는 군사 병력을 위한 다수의 막사와 보급창고가 마련되어 있어, 위급 시에는 등대를 통합 요새로 활용할 수 있었다. 제방과 연결된 지하 수로망은 담수와 식수를 공급하며 장기 고립 시에도 자체 생존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이처럼 등대는 단순 조명 시설을 넘어 해안 방어와 항구 운영의 중추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입니다. 앞서 제공된 내용에 이어, 알렉산드리아 등대의 나머지 주요 부분인 기능적 의의, 파괴와 발굴, 문화적 상징성, 현대 복원 노력까지 전문적인 어조로 완성된 내용을 아래에 이어서 작성하였습니다.

기능적 의의

알렉산드리아 등대는 단순한 항해 보조 수단을 넘어서, 고대 도시 기능의 중심축으로 작용했다. 특히 이 구조물은 항해 안전성, 세금 통제, 해군 감시, 제국 상징물이라는 다중 기능을 수행했다.

 

먼저 등대의 주요 목적은 해양 항로의 확보였다. 등대는 파로스 섬과 본토를 연결하는 인공 제방(Heptastadion)과 연계되어, 암초가 많은 해역에서 선박들이 안전하게 항구로 진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했다. 낮에는 청동 반사경이 태양빛을 수 킬로미터 밖까지 반사했으며, 밤에는 등화 장치가 불빛을 발산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의 반사경이 곡면 광학 시스템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제기하며, 이는 고대 광학 기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된다.

 

또한, 등대는 세관 감시 시설의 역할도 수행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항 중 하나였기 때문에, 입출항하는 선박을 통제하고 무역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도시 운영의 핵심이었다. 등대에서 파견된 감시 인원은 선박의 출몰을 육안으로 인지하고 항구로 정보를 전파하는 일종의 조기 경보 시스템을 구성했다.

 

군사적 기능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등대는 요새화된 구조로 설계되었고, 높은 위치에서의 조망을 바탕으로 적의 접근을 감지해 방어선을 준비할 수 있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로마 세력이나 시리아-셀레우코스 왕국과의 갈등 속에서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방어하는 데 있어 등대는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했다.

파괴와 해저 유적 발굴

자연재해에 의한 붕괴

알렉산드리아 등대는 약 1600년 이상 기능을 유지했으나, 중세에 접어들며 일련의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10세기부터 14세기 사이, 이집트 북부는 최소 세 차례의 대지진—956년, 1303년, 1323년—의 직격을 받았으며, 특히 1303년의 지진은 리히터 규모 7 이상으로 추정될 정도로 강력했다.

 

이러한 지진들은 등대의 기단부 및 중간부를 순차적으로 붕괴시켰고, 결국 14세기 초에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등대의 잔해는 파로스 섬 주변의 해저로 침강했고, 일부 잔존 구조물은 카이트베이 요새의 건축 자재로 재활용되었다.

1994년 이후의 해저 발굴

등대의 실존을 확증한 결정적 계기는 1994년 프랑스 고고학자 장-이브 엠페레르(Jean-Yves Empereur) 가 주도한 수중 탐사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항 인근 해저 약 7~8미터 깊이에서 스핑크스상, 오벨리스크 조각, 대형 화강암 기둥, 비문 조각 등 600여 점의 구조물을 발굴하였다. 이들은 모두 등대 혹은 그 주변 시설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석재들이며, 정밀한 위치 분석을 통해 등대의 기초부 위치까지 부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해저 유적은 높은 염도, 퇴적물 침강, 조류 변동 등의 영향으로 복원에 어려움을 주고 있지만, 발굴팀은 3D 스캔과 광측량 기술을 활용하여 디지털 아카이브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이로써 물리적 복원이 어려운 유적도 데이터로 보존 가능해졌으며, 일부는 가상현실(VR) 콘텐츠로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문화적 상징성과 현대 복원 노력

알렉산드리아 등대는 고대 문명이 남긴 기능적 유산이자 상징적 유산이다. 당시 등대는 그리스-이집트-로마 문명이 결합된 다문화 공간의 표상이었으며, 단일 목적을 넘어선 복합 건축의 효시로 평가된다. 특히 고대 세계에서는 등대를 도시의 '환영의 문'으로 여겼으며, 이는 현재의 공항 터미널이나 국경 게이트에 대응하는 역할이었다.

 

등대가 파괴된 이후에도 그 영향력은 남아 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 루카누스는 등대를 ‘지중해의 눈’이라 불렀고, 중세 유럽의 해도(海圖)에서는 등대가 여전히 중심 항로에 표기되었다. 19세기 이후 건설된 다수의 근대 등대들도 ‘파로스’라는 명칭을 차용했으며, 오늘날 영어로 등대를 뜻하는 “pharos”라는 단어 자체가 알렉산드리아 등대에서 유래했다.

현대 보존 및 복원 계획

이집트 문화유산부와 유네스코는 알렉산드리아 해저 유적을 세계 최초의 수중 박물관으로 지정하려는 계획을 2000년대 중반부터 추진 중이다. 이 계획은 발굴 유적의 보존과 관광 자원화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수중 터널형 박물관, 해저 전망대, 가상현실 체험관 등을 포함한다.

 

또한 최근에는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고고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3D 모델링과 증강현실(AR)을 결합하여, 등대가 있었던 위치에서 스마트폰이나 AR 기기를 통해 복원된 모습의 등대를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설계되고 있다.

결론

알렉산드리아 등대는 고대 세계의 기술, 예술, 정치, 경제가 응축된 복합체였다. 단순히 불빛을 밝히는 구조물을 넘어서, 항로를 확보하고, 세금을 통제하고, 제국의 위신을 과시하며, 문화적 상징으로 기능했다. 지진과 시간 앞에 결국 무너졌지만, 그 잔해는 오늘날 수중 고고학과 디지털 복원 기술의 중심 과제가 되었고, 이는 과거 유산을 미래에 전달하는 인류의 집단적 의지를 반영한다.

 

알렉산드리아 등대는 이제 더 이상 실존하는 건축물이 아니지만, 기억 속에서 그리고 기술 속에서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고대의 불빛이 아니라, 인류 문명이 남긴 빛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