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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호 사건 : 1970년 JAL 351편 적군파의 북한행 납치

by NewWinds 2025. 10. 30.

요도호 사건은 1970년 3월 31일 일본 적군파가 일본항공 351편(보잉 727-89, 애칭 ‘요도’, 등록 JA8315)을 공중 납치해 평양행을 요구하고 결국 북한 미림비행장에 착륙해 망명을 허용받은 하이재킹 사건입니다. 하네다발 후쿠오카행 국내선이었던 이 항공기는 후쿠오카에 급유 착륙한 뒤 한국 관제당국의 기지로 김포공항에 위장 착륙했다가, 일본 정부 차관을 인질로 교환하는 조건으로 4월 3일 북한으로 향하며 79시간에 걸친 대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사건 개요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 33분,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을 이륙한 일본항공 351편은 후쿠오카로 향하던 중 납치되었고,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해 총 138명이 기내에 있었습니다. 기체는 보잉 727-89형으로 일본항공이 당시 항공기에 붙이던 일본 강 이름 관행에 따라 ‘요도(淀, still water)’라는 애칭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널리 ‘요도호 하이재킹 사건(よど号ハイジャック事件)’으로 불리며, 현대 일본 항공보안의 전환점이 된 대표적 납치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배경과 적군파

사건의 주체인 ‘적군파(赤軍派, Red Army Faction)’는 1960년대 일본 신좌파 학생운동에서 갈라져 무장혁명을 지향한 급진 분파로, 시오미 다카야가 주도한 ‘제2차 분트(Second Bund)’ 내 강경 노선에서 출발했습니다. 적군파는 1970년 안보투쟁 시기와 맞물려 ‘즉각적 무장봉기’를 표방했고, ‘오퍼레이션 피닉스’라 불린 하이재킹 계획을 통해 해외에서 군사훈련을 이어가려는 구상을 세웠습니다. 시오미가 1970년 3월 15일 도중에 체포되었음에도 남은 조직원들은 계획을 강행했고, 그 결과 3월 31일 ‘요도호’ 납치가 실행되었습니다.

납치의 시작

이륙 약 20분 후, 다미야 다카마로 등 9명의 적군파 조직원이 일본도(가타나)와 자제 폭탄을 들이대며 납치를 선언했고, 조종실을 장악해 쿠바 아바나행을 요구했습니다. 승무원 7명을 포함한 138명을 인질로 잡은 뒤 조종사에게 항로 변경을 지시했으나, 보잉 727의 항속과 탑재 연료로는 쿠바행이 불가능하다는 설명에 따라 ‘평양행’으로 목표를 바꾸었습니다. 기장 이시다 신지는 연료와 안전을 이유로 먼저 후쿠오카 착륙을 설득했고, 항공기는 오전 8시 59분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해 급유와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후쿠오카 착륙과 인질 일부 석방

일본 경찰과 당국은 활주로를 고장 항공기로 막는 등 지연 전술을 폈으나 범인들을 자극해 긴장을 고조시켰고, 기장과 협상 끝에 여성·어린이·환자·고령자 등 23명이 오후 1시 35분 석방되었습니다. 이때 조종사들에게 한반도 지도와 함께 긴급 주파수(121.5 MC)를 청취하라는 쪽지가 전달되었고, 이는 이후 관제 기만작전의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오후 1시 59분 요도호는 평양행을 공언하며 후쿠오카를 이륙했고, 한반도 동해안을 북상한 뒤 서쪽으로 선회하며 한반도 상공으로 진입했습니다.

김포공항 ‘평양 위장’ 착륙

한국 관제당국은 요도호가 북한으로 가지 못하도록 무전 유도와 주파수 변경을 통해 서울 김포공항으로 유도했고, 공항에는 ‘평양 도착 환영’ 현수막과 북한군 복장의 인원이 배치되는 등 치밀한 위장공작이 진행되었습니다. 요도호는 3월 31일 오후 3시 16분경 김포국제공항에 착륙했으나, 일부 정황과 문답에서 위장을 눈치챈 납치범들이 의심을 품으면서 현장 긴장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결국 한국과 일본 당국은 일본어를 포함한 다국어로 교섭을 전개하며, 인질 전원 석방과 항공기 안전 확보를 위한 선택지를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한일 공조 협상과 인질 교환

한국 정부 대표단과 함께 일본 측에서는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성 정무차관이 들어와 본격 협상에 참여했으며, 일본 정부는 승객·승무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되 범인들의 출국 문제를 한국 측과 논의했습니다. 일본은 국제 적십자 및 제3국(소련 등) 경로로 북한 측에 인도적 보호를 타진했고, 한국은 전년도 KAL YS-11 납북 전례를 고려해 기체와 인질의 북송 가능성에 강한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최종적으로 4월 3일 야마무라 차관이 잔여 인질을 대체하는 ‘인질 교환’에 동의하여 탑승했고, 그 시점에 승객과 객실 승무원들이 석방되어 일본 특별기로 귀환 수송이 진행되었습니다.

북한행 이륙과 미림비행장 착륙

4월 3일 오후 6시 5분, 조종사 3명과 야마무라 차관, 범인 9명만 남은 요도호는 김포를 이륙해 휴전선을 넘어 북측 영공으로 진입했으며, 북한 공군의 식별 응답 없이 평양 인근으로 접근했습니다. 해가 저무는 시각, 기장은 태평양전쟁기의 야간 특공 교관 경험을 살려 평양 교외의 구 미림비행장 철거지 활주로에 오후 7시 21분 착륙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무장 해제를 요구했고 기내 무기가 장난감·모조품이었음이 드러났으며, 이어 범인 9명 전원에게 사실상 정치적 망명이 허용되었고 항공기와 나머지 인원은 이후 송환되었습니다.

승객·승무원 귀환

북측은 4월 4일 ‘인도적 관점’에서 승무원 3명과 야마무라 차관, 항공기를 일본으로 돌려보낸다고 발표했고, 실무 이행 후 4월 5일 당사자들의 귀환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시 항공 운영과 외교 경로를 통해 이뤄진 협조로 인해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고, 79시간 안팎의 긴 대치 상황이 종결되었습니다. 이 일련의 귀환 과정은 일본 내 여론의 안도와 동시에 국제 항공보안과 대테러 협력의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담자 신원과 이후

실행 가담자는 ‘요도호 그룹’으로 불리며, 다미야 다카마로(사망 1995), 고니시 다카히로, 오카모토 다케시(오카모토 코조의 형), 다나카 요시미(사망 2007), 우오모토 기미히로, 와카바야시 모리아키, 아카기 시로, 요시다 긴타로(사망 추정), 시바타 야스히로(사망 2011) 등 9명이 확인됩니다. 배후 지원에는 시오미 다카야 등 적군파 간부가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았고, 일부 실행범은 북한 체류를 지속하며 귀국 의사를 표명하거나 비밀 귀국·체포·형 집행 및 사망 등 다양한 경로를 밟았습니다. 2004년에는 잔존 가담자들이 일본 귀국과 처벌 수용 의사를 북측에 타진했고, 2024년 11월에는 북측 사정으로 대일 소통 중단을 알리는 이메일이 일본 측 지원단체에 전달되는 등 근황 또한 확인되었습니다.

항공기의 그 후

사건 후 일본항공은 항공기에 붙이던 애칭 관행을 폐지했고, 해당 기체는 1970년 도입된 크레인 도색으로 재도색된 뒤 항공사 재편 과정에서 1971년 도아국내항공(TDA)로 이관되어 ‘호노코’ 애칭으로 1975년까지 운용되었습니다. 1976년 독일 하팍 로이드 플루크로 매각된 뒤 1990년대에는 미국·유럽 등에서 전세운항(N511DB)으로 쓰였고, 1997년에는 밴드 U2의 PopMart 투어 전세기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이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9Q-CBF 코드로 VIP기로 쓰이다가 2012년 현지에서 해체되며 기체의 여정이 끝났습니다.

일본 사회와 항공보안에 남긴 의미

요도호 사건은 일본 여객기의 최초 납치가 북한 망명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고, 좌파 급진운동과 냉전 구도가 얽힌 동북아의 특수성을 드러냈습니다. 사건을 계기로 항공사 운영 관행 변화와 공항·항공기 보안 강화의 필요성이 공론화되었으며, 무장 납치에 대한 조종·관제·경찰 간 협력 매뉴얼의 중요성이 재확인되었습니다. 더불어 ‘해외 혁명 기지’ 상상과 실제 북한 체류 현실의 괴리가 여실히 드러나면서 일본 내 급진좌파 운동의 노선과 대중적 설득력에도 장기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에서의 관제 기지와 공조

한국 관제당국은 긴급 주파수 유도와 ‘평양 위장’이라는 비군사적 창의 전술로 승객 안전과 사태 관리의 시간을 벌어 협상 국면을 열었습니다. 김포공항 현장 위장과 다언어 교섭 전환, 일본 정부 대표단의 현장 참여는 한일 공조의 상징적 장면을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인명 피해 없이 위기를 넘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냉전기 한반도 안보 환경에서 항공 대테러 대응의 특수성과 즉응성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됩니다.

문화적 재현

요도호 납치는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기사, 회고록의 소재가 되었고, 2025년 한국의 블랙코미디 영화 ‘굿뉴스’가 느슨하게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김포공항 ‘평양 위장’ 설정을 시각적으로 재현했습니다. 작품들은 사건의 비극성뿐 아니라 ‘혁명’과 ‘현실’의 괴리, 관료와 현장 실무자의 기지, 인질 협상의 아이러니 같은 주제를 다층적으로 조명했습니다. 이는 동북아 냉전사의 한 장면을 현재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문화적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주요 인물 정리

  • 조종 승무원: 기장 이시다 신지, 부기장 에자키 데이이치, 항공기관사 아이하라 도시오 등 핵심 승무원 3인이 마지막까지 기내에 남아 안전 운항과 협상에 기여했습니다.
  • 일본 정부: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성 정무차관이 ‘인질 교환’ 결단으로 잔여 인질 전원 석방과 사건 종결의 길을 텄습니다.
  • 적군파: 다미야 다카마로가 기내 납치 선언의 선봉에 섰고, 와카바야시 모리아키 등은 이후 북한 체류를 지속하며 일부는 귀국·체포·사망 등 각기 다른 궤적을 남겼습니다.

연표로 보는 전개

  • 1970-03-31 07:33: 하네다 이륙, 직후 납치 발생.
  • 1970-03-31 08:59: 후쿠오카 착륙·급유, 23명 석방(13:35).
  • 1970-03-31 13:59: 후쿠오카 이륙, 한반도 동해안 북상.
  • 1970-03-31 15:16: 김포공항 ‘평양 위장’ 착륙.
  • 1970-04-01~03: 한일 공조 협상, 야마무라 차관 인질 교환 합의.
  • 1970-04-03 18:05: 김포 이륙, 19:21 평양 미림비행장 착륙.
  • 1970-04-04~05: 북측 송환 발표, 승무원·차관·항공기 귀환 완료.

사건의 법적·외교적 쟁점

사건은 일본 내 형사책임과 공소시효, 국제도피 상태의 범죄인 인도 여부, 북한 내 체류 인원의 신변과 통신 자유 등 복합 쟁점을 낳았습니다. 일본은 국내 공판과 사후 관리, 피해자 지원과 더불어 북한과의 비정상 외교 접촉에서 인도적 원칙을 관철하려 애썼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도 잔존 가담자 생사·귀환 문제, 북측 사정에 따른 연락 중단 등 현안이 간헐적으로 표면화되었습니다.

요약 평가

요도호 사건은 학생 급진운동과 냉전 지정학, 항공보안의 세 축이 교차한 대표적 하이재킹으로, 군사력보다 ‘기지’와 ‘협상’이 인명 피해를 최소화한 드문 사례로 남았습니다. 김포공항 위장 착륙과 인질 교환은 위험관리의 극한 선택이었고, 결과적으로 승객·승무원 전원의 생환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이후 항공사 운영 관행 변화와 보안 담론 강화, 문화적 재현을 통해 기억이 갱신되면서, 이 사건은 동아시아 현대사의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