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항검(柳恒儉, 1754-1801)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대에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로,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입니다. 전라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어 호남 지역 천주교 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호남의 사도'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호이자 명문 양반 가문 출신이었지만, 천주교의 평등 사상을 실천하며 신분의 벽을 넘어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명문가의 출신과 초기 생애
유항검은 1754년(영조 30년) 전라북도 전주의 초남이(현재의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지역에서 부유한 양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유동근(柳東根)이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본관은 진주입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갑춘(柳甲春)이고 외할아버지는 권기징(權沂徵)으로, 본가와 외가가 모두 당대 남인 명문 세족이었습니다. 유항검 집안은 '그 집 땅을 밟지 않고는 열 곳이 넘는 동네를 못 지나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호남의 대부호였습니다. 그가 소유한 토지는 금구, 김제, 만경, 여산 등 10개 고을에 산재해 있었으며, 줄잡아 15,000마지기가 넘는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유항검의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의 어머니와 자매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유항검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친척 권철신(權哲身)의 집에 머무르며 신학문을 배울 기회를 얻게 됩니다. 권철신은 당대 유명한 남인 학자였으며, 그의 동생 권일신(權日身)은 천주교 교리 전파에 열심이었습니다.
천주교 입교와 호남 지역 전교 활동
1784년(정조 8년) 조선에 정식으로 천주교가 창설된 직후, 유항검은 권일신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됩니다. 권철신과 문하생들이 서학(西學)을 공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양근을 방문하여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이승훈(李承薰)에게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호남 지역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입교 직후 고향 초남이로 돌아온 유항검은 가족과 친척, 노비 등에게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신분의 벽을 허물고, 그의 집에 있던 수십 명의 종들과 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까지 몸소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천주교의 평등 사상을 실천하며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노비와 비부(婢夫)에 이르기까지 따뜻하게 대했고, 가난한 이웃에게 애긍을 베푸는 나눔의 생활을 가정의 생활신조로 삼았습니다.
유항검의 부인을 필두로 여인들은 큰 가마솥에 쌀밥을 가득 지어 교리당에 천주학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도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지방에서 누리던 큰 존경과 영향력은 친구와 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가성직제도 참여와 중단
1786년(정조 10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천주교 지도자급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자신들 임의로 가성직자단을 만들었는데, 유항검은 이때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던 중 가성직제가 독성죄(瀆聖罪)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문제를 이승훈 등 교회의 지도층에 알려 가성직제에 의한 성무 활동을 중단하도록 한 사람도 바로 유항검이었습니다. 이는 유항검이 단순히 열성적인 신자를 넘어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지도자였음을 보여줍니다.
북경 밀사 파견과 주문모 신부 영입 지원
가성직제 중단 이후, 조선 천주교의 지도자급 신자들은 북경교회에 조선 천주교의 사정을 알리고 정식 신부를 모셔올 수 있는 밀사 파견을 준비했습니다. 유항검은 1789년(정조 13년) 말 윤유일(尹有一)이 북경에 파견될 때 필요한 자금을 헌납하여 이 중요한 사업을 지원했습니다.
1790년(정조 14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주교가 조상제사에 대한 금지령을 내리자, 유항검은 교회의 명을 충실히 지키기 위해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91년(정조 15년) 이종사촌인 윤지충(尹持忠)이 제사를 지내지 않은 일로 체포되어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발하자,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가 전주 감영에 자진 출두하여 배교한 뒤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이후 유항검은 다시 신앙생활을 계속했습니다. 1794년(정조 18년) 말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생 유관검(柳觀儉)을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했습니다. 조정에서 주문모 신부의 입국 소식을 알고 체포령을 내리자 주 신부는 지방으로 피신하며 순교하던 중, 전라도 지역까지 내려와 유항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유항검의 집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이곳에 일주일을 머무르며, 전라도 지방 최초로 미사를 봉헌하고 인근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는 호남 천주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대박청래 계획과 신유박해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주문모 신부는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타개하고자,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는 '대박청래(大舶請來)'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당시 서양인을 태운 큰 배는 곧 천주교의 세력을 의미했습니다. 역시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부당하게 여기고 있던 유항검이 앞장서서 이 계획을 지지하고 참여했습니다. 1796년 겨울 주 신부가 이 계획을 위한 편지를 베이징 대목구장 주교에게 보낼 때, 유항검은 동생 유관검 등과 함께 돈 400냥을 모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고, 이 일로 인해 유항검 일가는 후일 멸문지화를 당하게 됩니다.
1801년(순조 1년)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내리면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고, 유항검도 그해 3월에 전라도 지역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전주 감영에 체포되었습니다.
박해자들은 유항검을 '사학의 괴수'로 지목했습니다. 심문 과정에서 "서양 군함이 나와 조정에서 말을 순순히 듣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한바탕 결판을 내려야 한다"고 한 사실이 밝혀져,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 형조, 의금부에서 계속하여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항검은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기에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런 진술을 하지 않았고, 결국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목을 들어 능지처참형(凌遲處斬刑)이라는 극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순교와 유산
다시 전주로 이송된 유항검은 1801년 9월 17일(음력) 전주 풍남문 밖(현재의 전동성당 터)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또는 45세)였습니다. 능지처참형은 죄인의 몸을 여러 조각으로 난도질하여 죽이는 조선시대 최고 극형으로, 유항검이 받은 처벌의 가혹함을 보여줍니다.
유항검의 순교는 그의 가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아내 신희(申喜), 장남 유중철(柳重哲)과 그의 동정 아내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차남 유문석(柳文碩),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 등 일가족이 모두 순교했습니다. 유항검 집안의 노복이었던 김천애(金千愛, 안드레아) 등도 순교했는데, 박해가 일어났을 때 어떤 노복도 주인을 고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항검이 노복들을 얼마나 인격적으로 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유항검 일가가 순교한 후 그 많던 재산은 호조에 몰수되었으며, 그가 살던 집은 헐린 뒤 흔적조차 찾지 못하도록 연못으로 만들어지는 파가저택(破家邸宅)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은 노비가 되어 유배 길을 떠났는데, 당시 9세였던 장녀 유섬이(柳暹伊)는 거제도로, 6세이던 유일석(柳日碩)은 흑산도로, 3세이던 유일문(柳日文)은 신지도로 각각 유배되었습니다.
유항검 가족의 유해는 노복들과 신자들에 의해 처음에 초남이 근처의 바우배기에 매장되었다가, 전주성당(현 전동성당)의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1914년 치명자산(致命者山)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치명자산은 '하늘의 명을 받든 사람', 즉 순교자를 뜻하는 이름입니다.
복자 시복과 역사적 의의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124위 순교자 시복식에서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그와 함께 그의 가족인 유중철, 유문석, 신희, 이순이, 이육희, 유중성도 함께 복자가 되었습니다.
유항검의 역사적 의의는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호남 지역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서 전라도 지역 천주교 공동체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둘째, 막대한 재산을 가진 양반이면서도 신분의 벽을 넘어 평등 사상을 실천했습니다. 셋째, 북경 밀사 파견과 주문모 신부 영입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조선 천주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넷째, 가성직제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교회가 올바른 길로 가도록 했습니다. 다섯째, 순교 시 끝까지 신자들을 밀고하지 않아 신앙의 증거자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2021년 3월 11일, 유항검의 땅이었던 바우배기에서 230여 년 전 사라졌던 윤지충과 권상연의 묘가 발견되어 한국 가톨릭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유항검이 이종사촌인 윤지충과 외종사촌인 권상연의 시신을 장사 지내고, 후일 발견되기를 바라며 표식을 남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유항검이 단순히 자신의 신앙만이 아니라 후대 교회의 미래까지 내다본 지혜로운 지도자였음을 보여줍니다.
현재 전주와 그 인근에는 유항검과 관련된 여러 성지가 있습니다.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초남이성지, 그가 순교한 전동성당, 그의 가족들이 순교한 전주옥순교지와 전주 숲정이성지, 그와 그의 가족이 합장된 치명자산성지 등이 그것입니다. 이 성지들은 유항검이 호남 천주교회에 남긴 깊은 영향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재산과 명예를 버리고 신앙을 선택한 순교자이자, 신분의 벽을 넘어 평등을 실천한 사회개혁가이며, 호남 지역 천주교 공동체를 세운 사도였습니다. 그의 삶과 순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참된 의미와 사회 정의 실천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