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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 고모 : 명나라 황실에 공녀로 간 조선 여인들, 명나라 영락제와 선덕제의 후궁

by NewWinds 2025. 10. 15.

인수대비의 고모는 조선 초기 명나라 황실에 공녀로 보내져 황제의 후궁이 된 한씨 집안의 두 여인을 의미합니다.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에게는 여러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그 중 두 명의 누이가 명나라 황실에 공녀로 선발되어 각각 영락제와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첫째 고모는 강혜장숙여비 한씨로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고, 둘째 고모는 공신태비 한씨(한계란)로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조선과 명나라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청주 한씨 집안이 조선 왕실과 혼인을 맺고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첫째 고모 강혜장숙여비 한씨의 생애

인수대비의 첫째 고모인 여비 한씨는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로, 조선이 명나라에 보낸 114명의 공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는 미모가 빼어나 1417년 명나라에 공녀로 선발되어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고, 여비에 봉해졌습니다. 당시 한확은 자신의 누이를 명나라에 공녀로 보내면서 그녀를 호송하였고, 이를 계기로 정5품 봉의대부 광록시소경이라는 명나라 작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비 한씨는 명나라 황실 내에서 황후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으며, 영락제의 황후인 인효문황후 서씨가 사망한 후에는 명나라 내명부를 총괄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비 한씨의 인생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1421년 황제를 시해하려 한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후궁, 궁인, 내시들이 대거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여비도 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습니다. 비록 사형은 면했지만, 1424년 영락제가 북정 중에 유목천에서 사망하자 순장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비는 새 황제인 홍희제에게 무릎을 꿇고 연로한 어머니를 모실 수 있도록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황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교수형에 처한 뒤 순장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사후에는 강혜장숙여비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둘째 고모 공신태비 한씨의 파란만장한 삶

인수대비의 둘째 고모인 공신태비 한씨는 이름이 한계란으로, 1410년 음력 4월 9일 한영정과 의성 김씨 사이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한확의 여동생이자 인수대비의 친고모였습니다. 공신태비 한씨가 공녀로 선발된 배경에는 언니인 여비 한씨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점과 얼굴이 아름답다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영락제가 사망하고 홍희제를 거쳐 선덕제가 즉위하자, 조선 출신 환관들이 순장으로 죽은 여비 한씨의 막내 동생도 절색이라고 선덕제에게 바람을 넣었고, 선덕제는 한씨의 동생을 보내라고 조선에 통보하여 1427년 5월 공녀로 지명되었습니다.

 

공녀로 선발되었을 때 한계란은 극심한 저항을 보였습니다. 그녀는 언니가 순장당한 것을 목격했고, 명나라 황실을 내리사돈 삼아 부귀를 누리려는 오라비 한확에게 분노하며 1년 동안 울화병을 앓았습니다. 한계란은 오빠가 명약을 지어오자 "벌써 누이 하나를 팔아 부귀가 지극한데 나까지 팔아 호사를 누리려는가"라고 욕을 하며, "큰누이를 팔아 큰 부귀를 누렸는데, 작은누이까지 팔아 얼마나 더 부귀를 누리려 하는가"라고 절규하며 혼수로 준비해뒀던 물품들을 다 찢어버리고 패물을 내팽개쳤다고 합니다. 명나라로 떠나는 당일 세인들은 "언니가 생매장을 당했는데 동생은 산송장 신세로구나"라고 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로 간 이후 한계란의 운명은 언니와는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선덕 연간 내내 총애를 받아 오라비 한확이 조선에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선덕제의 사망 이후에도 운이 따라 순장당하는 것을 피해 생존하였습니다. 이후 영종 정통제가 토목의 변으로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에게 포로로 잡히고 동생인 대종 경태제에게 제위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하자, 함께 폐태자가 된 정통제의 3살 배기 아들 주견심을 맡아서 기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절대군주 체제하의 국가에서 폐태자를 도와줬다가 역모 혐의를 뒤집어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명나라 황실 내에서의 영향력과 역할

공신태비 한계란의 용기는 큰 보상을 받게 됩니다. 8년 만에 정통제가 기적적으로 귀환하고 제위를 되찾으면서 앞길이 다시 펴지게 되었고, 맡아서 기르던 폐태자 주견심은 고스란히 황태자로 복권되어 다음 황제인 헌종 성화제로 즉위하였습니다. 정통제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고 자기 아들을 살려주며 길러준 사람이었으니 고맙지 않을 리가 없었고, 특히 성화제는 어렸을 때 키워준 공로에 보답한다며 한씨를 극진하게 대접했으며, 한씨 역시 황실의 일을 잘 알았으므로 모두가 그 출신을 개의치 않고 큰 어른으로 여겼다고 전해집니다. 정통제가 순장 제도를 폐지한 덕택에 공신태비 한씨는 큰언니와는 달리 천수를 누려 성화 연간 19년인 1483년에 향년 74세를 일기로 병사하였습니다. 성화제는 크게 애곡하며 '공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비로 추존했다고 전해집니다.

 

공신태비 한계란은 말년까지 비선으로서 모국인 조선의 외교와 국방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습니다. 명나라 조정은 한때 조선의 군비 증강을 꺼려 조선 활의 주재료이자 100% 수입산 전략물자인 물소뿔의 무역을 통제했는데, 공신태비 한씨가 단신으로 황제에게 탄원하여 통제가 풀리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한확의 아들이자 공신태비 한씨의 조카인 한치례가 북경에 들어가 정동을 만났을 때, 정동이 공신태비 한씨에게 전달하기 위해 궁각을 청하는 일을 쓰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공신태비 한계란은 성화 연간에 황태후로부터 각 비빈에 이르기까지 황궁 내에서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명나라의 조정 관료들로부터는 조선에 이익을 주기 위해 본국인 명나라에 손해를 끼친다고 하여 평가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청주 한씨 집안의 권세와 인수대비와의 관계

청주 한씨 집안은 성조 영락제와 선종 선덕제 시기에 명나라 황실의 외척이라 하여 조선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는데, 그 권세가 영종 천순제와 헌종 성화제 시기까지 이어진 것은 오로지 공신태비 한씨 덕분이었습니다. 황제조차도 공신태비 한씨를 극진히 대했으므로 오라비 한확의 아들들에다가 청주 한씨의 방계들까지 돌아가면서 명나라를 왕래하며 부귀를 누렸고, 특히 한확의 아들인 한치례가 대를 이어 대중국 외교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성종실록에는 한치례, 한치인, 한치의, 한치형, 한충인, 한한, 한찬, 한건 등이 서로 갈마들면서 부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금대와 서대를 띠는 것이 모두 황제의 칙지에서 나왔고, 금은과 채단의 상사가 다함이 없어 한씨의 일족은 정동으로 인하여 앉아서 부귀를 취하고 해를 나라에 끼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평가되었습니다.

 

인수대비의 집안 배경은 그녀가 왕실과 혼인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그녀의 고모 2명이 명나라 황실의 후궁이었던 것입니다. 부친인 한확은 명나라 황제의 최측근의 친족으로 신임 받았기에,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세종도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한 한확에게 계속해서 고관대작을 제수하였고, 아예 자신의 아들과 한확의 둘째딸을 혼인시켜 그와 사돈을 맺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한확은 명나라 황실은 물론 조선의 왕실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누가 뭐래도 당대 최고의 권력가였습니다. 인수대비는 그런 한확의 2남 6녀 중 딸로는 막내딸로 태어났으며, 인수대비가 태어나던 해가 그녀의 언니가 세종의 아들과 결혼한 해이니, 인수대비는 당시 집안이 아주 잘 나갈 때에 금수저 중에서도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조선과 명나라 외교 관계에 미친 영향

인수대비의 고모들은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공신태비 한계란은 명나라 황실 내에서 조선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물소뿔 무역 통제를 해제하는 등 실질적인 외교 성과를 이끌어냈습니다. 한확은 누이들이 명나라 황실에서 누리는 지위를 바탕으로 세조의 왕위 정당성을 명나라에 설득하여 외교에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인수대비가 조선 왕실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하는 데 큰 밑받침이 되었으며, 그녀의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집안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생모이자 폐비 윤씨의 시어머니로서, 강직한 성격으로 유명하였으며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의 승하 이후 계비로 책봉된 중전 윤씨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급기야는 성종의 용안에 손톱 자국을 내는 지경에 이르자 진노하여 중전 윤씨를 폐서인하여 사가로 내쫓았습니다. 이러한 인수대비의 성격과 행동은 그녀가 자란 집안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모들이 명나라 황실에서 겪었던 치열한 생존과 권력 투쟁의 이야기는 인수대비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며, 이는 그녀가 왕실의 여성으로서 강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인수대비의 고모들은 조선 초기 역사에서 공녀로 명나라에 보내진 여인들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특히 공신태비 한계란은 비극적인 운명을 극복하고 명나라 황실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성장한 특별한 사례입니다. 그들의 삶은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국가 간 외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여성들의 아픔을 보여주는 동시에,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갔던 강인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수대비의 정치적 영향력과 강직한 성격의 뿌리에는 이러한 고모들의 삶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