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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용 :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른 치유의 의사, 분단의 아픔을 품고 산 의학자

by NewWinds 2025. 9. 6.

서론: 위대한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서 피어난 의학자

한국 의료계의 거대한 산맥으로 불리는 장기려 박사.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며 평생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이미 전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차남 장가용(張家鏞, 1935-2008)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아버지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장가용은 아버지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의학자와 교육자로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분단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며, 동시에 의학 발전과 후진 양성에 평생을 바친 조용한 봉사자의 이야기입니다.

1장: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된 남한에서의 삶

피란길의 소년, 운명을 바꾼 결정

1935년 9월 20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가용은 어린 시절을 북한에서 보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겨우 15세의 소년이었습니다. 중공군이 남하하며 국군이 평양에서 급히 후퇴하던 1950년 12월, 장가용은 아버지 장기려와 함께 급작스럽게 남한으로 피란을 오게 됩니다.

 

손자인 장여구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잠시 피란을 갔다 돌아오기로 하셨는데, 차남인 제 아버지는 할아버지 가방을 들어드리려 따라갔다가 통금 시간이 다 되면서 얼떨결에 함께 내려오게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순간의 우연이 장가용의 평생을 결정지었고, 동시에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을 가져왔습니다.

부산에서의 새 출발

부산에 도착한 아버지와 아들은 1951년 영도에 복음병원을 설립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빈 땅에 천막 3개를 친 것에 불과한 병원에서 장가용은 아버지가 하루 200여 명의 피란민을 무료로 돌보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인생관과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2장: 의학자로서의 성장과 학문적 성취

서울대학교에서의 학문적 기반 구축

장가용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동 대학원에서 의학석사와 의학박사 학위를 모두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로, 학문적 깊이와 체계적인 연구 역량을 갖추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가 해부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199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의 백상호 교수와 함께 랑만의 『사람발생학』 7판 번역 작업을 주도했으며, 이후 2002년 8판까지 번역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한국 의학교육에 중요한 기여를 한 학술적 성과였습니다.

군의관으로서의 봉사

장가용은 대한민국 육군 군의무관으로 복무하여 소령으로 예편했습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여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생명의 소중함과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깊이 새겨주었을 것입니다.

3장: 교육자로서의 헌신과 제주대학교에서의 업적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

장가용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을 역임한 것입니다. 1998년 제주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신설될 때, 그는 학장으로서 의과대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제주도의회 내무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장가용 학장은 의과대학 설립과 관련된 각종 현안들을 도의회와 협의하며 제주 지역 의료 인력 양성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는 제주 지역 의료계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제주대학교에서의 성공적인 임무 수행 후, 장가용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업적과 교육자로서의 헌신이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4장: 가족과 신앙, 그리고 개인적 신념

의사 가문의 전통 계승

장가용은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안과 의사 윤순자와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장남 장여구도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외과 의사가 되었고, 현재 인제대 서울백병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이는 3대에 걸쳐 의사로서의 소명을 이어가는 의사 가문의 전통을 보여줍니다.

깊은 신앙심과 봉사정신

아버지 장기려와 마찬가지로 장가용도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예장고신 교단의 장로로서 신앙 공동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배경은 그의 의사로서의 봉사정신과 환자에 대한 사랑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5장: 분단의 아픔과 이산가족의 한

50년 만의 극적인 모자상봉

장가용의 삶에서 가장 극적이고 감동적인 순간은 2000년 8월 17일 평양에서 이루어진 어머니와의 상봉이었습니다. 평양 보통강 호텔에서 89세의 어머니 김봉숙 씨를 50년 만에 만난 순간, 그는 오열을 터뜨렸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아무 말 없이 우시는 그 마음 속을 자식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회상한 장가용은, 어머니를 부둥켜 안고 젖가슴을 만진 뒤에야 어머니를 만났음을 실감했다고 합니다.

가슴 아픈 재회의 순간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어머니가 "이게 꿈입니까, 생시입니까"라고 존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장가용이 1940년 서울역에서 어머니가 자기를 등에 업고 걷다 넘어져 시멘트 바닥에 뺨이 긁혀 피가 나자 5살이었던 자신이 어머니 뺨을 어루만지던 일을 기억해 얘기하자, 그제서야 어머니는 "기억난다"고 말했습니다.

북에 남은 가족들의 삶

장가용은 이 상봉에서 누이동생 신용(60)·성용(58), 남동생 인용(55)도 만났습니다. 놀랍게도 아버지 장기려의 영향을 받아 식료공장 연구원인 신용을 제외하고 모두 의료인으로 성장했습니다. 평북 강계에서 의사생활을 하다 작고한 큰 아들 택용, 세포연구를 하는 성용, 강계의학대학 교수인 막내 인용까지 "훌륭히 일꾼으로 성장한 동생들을 보니 기뻤다"고 장가용은 말했습니다.

6장: 의학 연구자로서의 업적과 기여

해부학 교육의 선구자

장가용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의학도들을 가르쳤습니다. 특히 그가 참여한 『사람발생학』 번역 작업은 한국 의학교육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 책은 의학발생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서로, 장가용과 백상호 교수가 주도한 번역 작업을 통해 한국 의대생들이 최신 발생학 지식을 한국어로 학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의학교육의 질적 향상에 크게 기여한 업적으로 평가됩니다.

외과학 발전에 대한 기여

장가용은 아버지 장기려처럼 외과 의사로서도 활약했습니다. 비록 아버지만큼 극적인 업적은 남기지 않았지만, 꾸준히 환자 치료와 후진 양성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아들 장여구 교수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외과 의사가 된 것을 보면, 3대에 걸친 외과학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장: 말년의 삶과 사회적 기여

녹조근정훈장 수상

장가용은 2001년 녹조근정훈장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그의 오랜 공직 생활과 사회 기여가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설립과 운영에 기여한 공로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민련 보건행정교육특임위원 활동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지켰던 장가용이지만, 2001년 11월부터 2002년 1월까지 자민련 보건행정교육특임위원으로 활동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그의 의료 분야 전문성이 정치권에서도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조용한 교육자로서의 마지막 시간들

장가용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교육자로서 헌신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의학도들을 가르치며 한국 의료계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제주대학교 의과대학에서의 활동은 제주 지역 의료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8장: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은 봉사정신

청십자의료봉사단의 계승

비록 장가용 자신이 직접 청십자의료봉사단을 운영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들 장여구 교수가 할아버지의 봉사정신을 계승하여 청십자의료봉사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는 장기려 박사의 봉사정신이 3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사례입니다.

조용한 실천가의 삶

장가용은 아버지처럼 화려한 업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실천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료계와 교육계에 기여했습니다.

9장: 2008년, 생을 마감하며 남긴 유산

아버지보다 앞선 죽음

2008년 1월 19일, 장가용은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는 1995년 12월 25일 84세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장기려보다 13년이나 일찍 세상을 뜬 것입니다. 아버지가 평생 바라던 북한 가족과의 재회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입니다.

후세에 전해지는 정신

장가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장여구 교수가 조부와 부친의 정신을 이어받아 의료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여구 교수는 "북한에 있는 할아버지의 손자 17명 중 11명이 의사라고 들었다"며 "북의 사촌들과 의료봉사를 함께하며 남북 교류의 밑거름이 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10장: 장가용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

분단 1세대가 겪은 현실

장가용의 삶은 분단 1세대가 겪어야 했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15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고향을 떠나 평생을 이산의 아픔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은,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용한 기여자의 가치

장가용은 화려한 명성이나 큰 업적으로 기억되는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묵묵히 제 몫을 다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설립, 서울대학교에서의 교육 활동, 해부학 교재 번역 등은 모두 사회 발전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기여였습니다.

의사 가문의 전통 형성

장가용은 장기려 박사로부터 시작된 의사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를 통해 3대에 걸친 의사 가문이 형성되었고, 이는 한국 의료계에서도 드문 사례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직업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봉사정신까지 함께 전수했다는 점입니다.

결론: 아버지의 그림자를 넘어선 독립적 인생

장가용의 삶을 돌아보면, 그는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그 그림자 속에서 살았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독립적인 인생을 개척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제주대학교 의과대학의 기틀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제주 지역에 의료 인력 양성의 기반을 다진 것은 지역 의료 발전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일입니다.

 

또한 서울대학교에서의 오랜 교육 활동과 해부학 교재 번역 작업은 한국 의학교육의 질적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비록 아버지처럼 극적인 업적은 아니었지만, 꾸준하고 성실한 학자적 태도로 후진 양성에 헌신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2000년 평양에서의 어머니와의 상봉은 장가용 개인에게는 물론,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눈물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야 했던 모든 이산가족들의 마음을 대변했습니다.

 

장가용(張家鏞, 1935-2008).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의 차남이기 이전에, 의학자이자 교육자로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독립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조용한 헌신과 봉사정신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한국 사회 발전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의 아들 장여구 교수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의료봉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장가용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물질적 재산이 아니라 봉사정신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부의 상속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