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모법의 정의와 의미
종모법(從母法)은 조선시대 노비를 비롯한 천인과 양인의 신분 귀속 원칙을 규정한 법률입니다. 이 법은 노비 소생의 신분과 역(役), 그리고 주인을 결정하는 데 있어 모계(母系), 즉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한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머니가 노비이면 그 자녀도 노비가 되고, 그 자녀의 주인 역시 어머니의 주인과 동일하게 되는 제도입니다.
종모법은 조선사회의 신분제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법률입니다. 이 법은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 공천(公賤) 조항에 "무릇 천인의 신분과 소유는 어머니의 역에 따른다"고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조선시대 내내 신분 귀속의 기본 원칙으로 작용했으며, 노비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법률이었습니다.
종모법이라는 명칭은 "어머니를 따른다"는 의미의 한자어 從母法에서 유래했으며, 수모법(隨母法) 또는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이 법은 단순히 노비의 신분만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노비의 소유권 귀속 문제까지 함께 해결하는 포괄적인 법률이었습니다.
종모법의 역사적 기원 - 고려시대 천자수모법
종모법의 뿌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 10대 왕인 정종 5년(1039년)에 "천것은 어머니를 따르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는 기록이 『고려사』 형법지에 남아 있습니다. 이 법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라고 하는데, '천자'는 노비를 의미하고, '수모'는 어머니를 따른다는 뜻입니다.
천자수모법이 제정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이 있었습니다. 첫째, 노비의 자식들이 어머니만 알고 아버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았던 당시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둘째, 어머니 쪽을 중요시하는 토속적인 혼인 풍속이 남아 있었습니다. 셋째, 양인과 천인 신분의 혼란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의 천자수모법은 주로 노비 상호 간의 혼인으로 생긴 소생의 소유권을 결정하는 법규였습니다. 즉, 서로 다른 주인을 둔 노비끼리 혼인하여 자식을 낳았을 때, 그 자식이 누구의 소유가 되는지를 명확히 하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이 경우 자식의 소유권은 비(婢), 즉 여자 종의 소유주에게 귀속되었습니다.
또한 양인 남자와 여자 종이 혼인하는 경우에도 천자수모법이 적용되어, 그 소생은 종의 신분을 가지게 되고 여자 종의 소유주가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천자수모법은 조선시대 종모법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었으며, 본질적으로 동일한 법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종모법의 확립과 경국대전 규정
조선시대에 들어와 종모법은 더욱 체계화되고 법전에 명문화되었습니다. 특히 세종 14년(1432년)에 종모법이 다시 확립되었고, 이후 『경국대전』에 정식으로 규정되면서 조선왕조의 기본 신분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경국대전』 「형전」 공천 조항의 원문을 보면, "무릇 천인에 관련되는 자는 어미의 직역을 따른다. 다만, 천인이 양인 여자를 아내로 얻어 낳은 자식은 아비의 직역을 따른다[凡賤人所係, 從母役。唯賤人娶良女所生, 從父役]"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조문은 종모법이 원칙이지만, 예외적으로 종부법을 인정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규정에 대해 『경국대전주해후집(經國大典註解後集)』에서는 "그 아버지를 판별할 수 없는 자가 있으면 어머니의 역을 따르는 것은 쟁송의 근원을 근절시키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부계를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모계를 따르는 것이 분쟁을 줄일 수 있다는 실용적인 이유를 제시한 것입니다.
경국대전의 종모법 규정에 따르면, 노(奴)와 비(婢)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물론이고, 양인 남자와 비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도 모인 비의 소유자에게 귀속되었습니다. 다만 노와 양녀 사이에서 출생한 자는 예외적으로 종부법에 따라 처리되었습니다. 이렇게 『경국대전』은 종모법을 원칙으로 하되, 특정한 경우에는 종부법을 예외로 인정하는 절충적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종모법과 종부법의 차이점
종모법과 종부법(從父法)은 정반대의 원리를 가진 법률입니다. 종모법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것이라면, 종부법은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종모법 체제에서는 양인 남자와 천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어머니를 따라 천인이 됩니다. 반면 종부법 체제에서는 같은 경우에 아버지를 따라 양인이 됩니다. 거꾸로 노비 남자와 양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종모법에서는 어머니를 따라 양인이 되지만, 종부법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노비가 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노비의 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양인 남자가 천인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경우가 천인 남자가 양인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경우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따라서 종부법을 채택하면 노비 숫자가 차차 줄어드는 반면, 종모법을 실시하면 노비 숫자가 크게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태종 14년(1414년)에 노비종부법이 시행되어 양인의 수를 늘리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종 14년(1432년)에 다시 종모법으로 환원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경국대전』에는 종모법이 원칙으로 확립되었습니다. 다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천인 남자와 양녀 사이의 소생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종부법을 적용하는 절충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종모법의 시행 배경과 이유
세종이 종모법을 다시 확립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사회의 여러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태종 때 시행된 종부법으로 인해 여러 폐단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노비들이 양인과의 혼인을 통해 세금과 군역을 면하려는 시도가 빈번해졌습니다. 여종들이 자신의 자식을 양인으로 만들기 위해 양민과 천민을 번갈아 바꿔 상대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각 고을의 창기들이 이러한 방법을 통해 자식을 양인으로 만들려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둘째, 인륜을 파괴하는 사건들이 발생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1430년 10월에 발생한 '고미사건'입니다. 여종 이고미는 천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는 등 패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는 종부법이 부모 자식 사이, 부부 간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줍니다.
셋째, 허조를 비롯해 맹사성, 김효손 등의 신하들이 종부법의 인륜파괴 문제를 제기하며 개정을 줄기차게 요구했습니다. 『세종실록』 14년 3월 25일 기록에는 맹사성이 "태종과 대신들이 깊이 생각하고 숙의하여 종부법을 세웠으니 만세의 아름다운 법"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공사비가 천한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식을 양인으로 만들려고 양인을 끌어들여 친아버지라 칭하니, 이 때문에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아 상도를 무너뜨리고 인륜을 어지럽히니, 이는 오늘날의 큰 폐단"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세종은 종모법을 다시 확립함으로써 노비의 수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동시에 인륜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다만 세종은 종모법을 시행하면서도 양천교혼을 엄하게 금지하는 조치를 함께 내려 노비의 무분별한 증가를 막으려 했습니다.
종모법의 구체적인 적용 사례
종모법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양반 사대부들은 종모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노비를 증식시키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사헌 김태식에게 비(婢) 넷, 노(奴) 셋이 있고, 참봉 기호철에게 비 셋, 노 넷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김 대사헌의 남자 종이 기 참봉의 여자 종과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낳았다면, 종모법에 따라 그 7명의 자녀는 모두 여자 종의 주인인 기 참봉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김 대사헌 입장에서는 자신의 남자 종이 자식을 많이 낳았지만, 그 자식들이 모두 다른 사람의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가임 연령의 여자 종이 남자 종보다 훨씬 비쌌습니다. 여자 종은 자식을 낳을수록 주인의 재산이 복리 이자처럼 불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남자 종을 소유한 양반들은 어떻게 재산을 증식했을까요? 이들은 『경국대전』의 예외 조항을 활용했습니다. "천인이 양인 여자를 아내로 얻어 낳은 자식은 아비의 직역을 따른다"는 규정에 따라, 양반들은 자신의 남자 종을 양인 여자와 결혼시켰습니다. 이 경우 태어나는 자식들은 예외적으로 종부법이 적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천인이 되고, 그 주인은 아버지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천인과 양인처 사이에서 태어난 노비는 반노(班奴), 반비(班婢)로 불렸습니다. 고문서, 특히 분재기(分財記)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중종, 명종, 선조 때에는 남자 종이 양인 여자와 결혼하는 비율이 80%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고 합니다. 이는 권력을 가진 양반들이 자신의 재산 증식을 위해 권력을 활용하여 남자 종을 양인 여자와 혼인시킨 결과였습니다.
종모법과 일천즉천의 관계
종모법과 일천즉천(一賤卽賤)은 흔히 혼동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른 개념입니다. 일천즉천은 부모 중 어느 한쪽이라도 노비이면 그 자식도 노비가 되는 원칙입니다. 반면 종모법은 어머니가 양인이면 아버지가 노비라도 그 자식은 노비가 아닌 양인이 됩니다.
조선 초기에는 일천즉천이 아닌 노비종부법 또는 노비종모법을 택해 부모 중 한쪽이 노비여도 무조건 그 자식들이 노비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조의 치세 때 만들어진 『경국대전』을 통해 일천즉천으로 제도가 완전히 변경되었습니다. 세조 7년(1461년) 7월에 『경국대전』 「형전」이 반포되었을 때 이미 일천즉천의 원칙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일천즉천 체제에서는 앞서 설명한 종모법의 예외 조항, 즉 "천인이 양인 여자를 아내로 얻어 낳은 자식은 아비의 직역을 따른다"는 규정도 결국 그 자식을 천인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부모 중 한쪽만 천인이어도 자식은 천인이 되는 일천즉천의 원리가 관철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천즉천 체제는 영조 시대가 되어서야 다시 종모법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영조 7년(1731년)에 종모법이 부활하면서, 아버지가 노비이고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 그 자녀는 어머니를 따라 양인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조대 종모법 개혁과 신분제 변화
영조는 1731년(영조 7년)에 약 270년 만에 일천즉천법을 폐지하고 종모법으로 환원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를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이라고 하는데, 노비 남자와 양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소생은 어머니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 법의 실시로 기존에 노비였던 양인 여성 소생의 자식들이 모두 종량(從良), 즉 양인의 신분을 얻게 되어 노비 신분에서 대규모로 해방되었습니다. 그 결과 18세기 이후 조선의 노비 인구는 전체 인구에서 10% 미만 정도로 그 비율이 크게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종모법 개혁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대구부를 기준으로 할 때, 개혁 이후 양반이 18.7%로 약 10% 정도 급증했고, 노비는 26.6%로 10%나 크게 줄었지만, 정작 양인은 54.6%로 별로 변화가 없었습니다. 즉, 노비 숫자가 줄어든 만큼 양인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반의 숫자가 늘어난 것입니다.
이는 부를 축적한 백성들이 공명첩(空名帖, 이름을 비워놓은 관직 임명장)을 산다든지, 양반들에게 직첩(職牒, 벼슬 임명장)을 산다든지, 향리에게 돈을 주고 호적을 바꾸는 등의 방법을 통해 양반 신분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와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영조 대에 시행된 종모법 개혁은 노비의 숫자를 크게 줄였지만 태종, 세조 때와는 달리 양인의 숫자를 효과적으로 늘리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혁은 양천교혼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길을 열어주었고, 이후 조선 후기 신분제 해체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모법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
종모법은 조선사회의 신분 구조와 인구 구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첫째, 종모법은 노비의 수를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양인 남자와 천인 여자 사이의 자녀가 모두 천인이 되었기 때문에, 양인의 수는 감소하고 노비의 수는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둘째, 종모법은 양반 사대부들의 재산 증식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양반들은 자신의 여자 종을 통해, 또는 남자 종을 양인 여자와 혼인시킴으로써 노비를 증식시켰습니다. 이는 양반 계층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셋째, 종모법은 양인의 감소로 인한 군역 부담자의 감소라는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조선은 양인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고자 했고, 특히 군역은 양인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종모법으로 인해 양인의 수가 줄어들면서 군사력 유지가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넷째, 종모법은 쟁송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경국대전주해후집』의 설명처럼, 아버지를 판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모계를 따르는 것이 소유권 분쟁을 근절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섯째, 종모법은 조선 후기 신분제 변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조 대에 종모법이 부활하면서 노비의 신분 상승이 가능해졌고, 이는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와 해체로 이어졌습니다.
여섯째, 종모법은 외할아버지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습니다. 조선에서는 과거 시험을 볼 때 사조(四祖), 즉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를 기록해야 했는데, 이는 어머니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종모법이 있었기 때문에 외할아버지가 천인이면 본인도 천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모법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종모법은 조선시대 신분제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법률이며, 여러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종모법은 고려시대 천자수모법의 전통을 계승하여 한국 고유의 법제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중국의 종부법과 달리 종모법을 원칙으로 채택한 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신분법 체계였습니다.
둘째, 종모법은 노비의 소유권 분쟁을 줄이는 실용적인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부계를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던 당시 상황에서, 모계를 따르는 것은 법적 안정성을 높이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셋째, 종모법은 조선시대 신분제의 변화와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종부법과 종모법 사이의 논쟁, 일천즉천으로의 변화, 그리고 영조 대의 종모법 부활 등 일련의 과정은 조선사회가 신분제 문제를 어떻게 고민하고 해결하려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넷째, 영조 대 종모법의 부활은 조선 후기 신분제 해체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노비들이 양인 신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신분 상승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종모법은 여러 한계와 문제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종모법은 양반 사대부들의 재산 증식 수단으로 악용되었습니다. 양반들은 종모법과 그 예외 조항을 이용하여 노비를 늘리는 데 활용했고, 이는 노비제도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둘째, 종모법은 양인의 감소를 초래하여 국가의 군역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이는 국가 운영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고, 끊임없이 종부법 논쟁이 재발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셋째, 종모법과 그 예외 조항은 양천교혼을 사실상 허용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법적으로는 양천교혼을 금지했지만, 종모법의 예외 조항 때문에 양반들이 자신의 남자 종을 양인 여자와 혼인시키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이는 법의 일관성을 해치는 문제였습니다.
넷째, 영조 대 종모법 부활의 결과가 기대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노비의 감소가 양인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고 양반의 증가로 이어진 것은, 신분제도가 더 이상 법률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동요는 종모법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력을 통한 신분 매매, 공명첩 판매, 호적 변조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종모법은 이러한 변화의 한 계기를 제공했지만, 신분제 해체의 근본 원인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 구조의 전반적인 변화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모법은 단순한 신분 귀속 법률을 넘어, 조선시대 사회 구조와 신분제도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제도였습니다. 고려 정종 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영조 대에 다시 부활하고, 결국 19세기 갑오개혁을 통해 노비제도 자체가 폐지될 때까지, 종모법은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 사회의 신분제를 규율하는 핵심 법률로 기능했습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신분제도가 어떻게 작동했고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