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비(斥和碑)는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서양 열강의 침략을 물리친 후 쇄국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입니다.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직후 흥선대원군은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 200여 개소의 교통 요충지에 이 비석을 세웠습니다. 척화비는 "화친을 배척한다"는 뜻으로,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단호히 거부하는 조선의 입장을 백성들에게 분명히 알리고자 한 상징물이었습니다.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새겨져 있어 당시 조선의 대외정책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척화비의 역사적 배경
척화비가 세워진 19세기 중후반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던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청나라 황제가 피난을 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의 지배층에도 위기감이 확산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이 사건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획득하여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미국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반도로 접근하며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에 봉해지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집권 초기 흥선대원군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프랑스 신부들의 활동으로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자 유생들이 존왕양이 사상을 바탕으로 정부에 강경 정책을 요구했고,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병인박해를 단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이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는 군사적 충돌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척화비 건립으로 이어지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병인양요는 1866년(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입니다. 병인박해로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한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자, 천진에 있던 프랑스 극동사령관 로즈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습니다. 프랑스군은 1차 침공 때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나루와 서강까지 순찰한 후 물러갔으나, 이내 전력을 보강하여 강화도를 점령했습니다. 프랑스는 책임자 처벌과 통상수교를 요구했으나 흥선대원군이 거부하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고, 1866년 11월 퇴각하면서 강화읍을 파괴하고 외규장각에서 의궤를 비롯한 수천 권의 서적과 19만 프랑 상당의 은괴를 약탈했습니다.
병인양요 이전인 1866년 8월에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의 무역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진출하며 통상을 요구했는데, 조선 관리를 납치하고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분노한 평양 군민들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승무원 24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신미양요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신미양요는 1871년(고종 8년)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항의와 조선의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입니다. 미국은 85문의 대포와 1,230명의 병력을 실은 군함 5척을 보내 강화도에 상륙했습니다. 조선 측은 손돌목에서 포격을 가했고, 이를 빌미로 미군은 초지진,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까지 공격했습니다. 광성보에서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600여 명의 조선군이 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어재연 장군은 수자기를 게양하고 끝까지 항전했으나, 우세한 화력을 가진 미군에 맞서 동생 어재순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240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자결, 2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미군은 3명이 전사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미군은 군사적으로 승리했으나 조선의 완강한 저항으로 개항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철수했습니다.
척화비의 건립
신미양요에서 미군이 철수한 직후인 1871년 음력 4월 25일,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습니다. 병인양요 직후인 1866년에 척화비의 비문을 지었으나, 실제로 전국적으로 건립한 것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1871년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강화도, 부산 동래군, 함양군, 경주, 부산진 등 전국의 교통 요충지 200여 개소에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척화비는 국민에게 서양 세력 배척 의지를 널리 알리고 경각심을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되었습니다. 당시 의주부윤의 기록에 따르면 비석 한 기를 건립하는 데 300여 냥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운 후 "서양의 배에서 나는 연기와 먼지가 온 천하를 뒤덮어도, 동방국의 광채는 의연하게 영원토록 빛나누나"라는 시를 지어 쇄국 의지를 더욱 분명히 했습니다.
척화비의 내용과 의미
척화비에는 주문으로 다음과 같은 12자가 크게 새겨져 있습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이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비석의 옆면에는 작은 글자로 다음 문구가 추가로 새겨져 있습니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이는 "우리 만년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1866년)에 짓고 신미년(1871년)에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이 문구를 통해 척화비가 병인양요 직후인 1866년에 구상되었으나 신미양요 이후인 1871년에 실제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척화비의 비문은 병인양요 이래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가 주장해온 구호를 명문화한 것으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자주성을 지키려는 조선의 의지를 강력히 표현했습니다. 동시에 서양 세력과의 교류를 일체 거부하는 쇄국정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척화비의 규모와 형태
척화비는 화강석으로 제작되었으며, 높이 4자 5치(약 135cm), 너비 1자 5치(약 45cm), 두께 8치 5푼(약 25cm) 규모로 만들어졌습니다. 비석의 형태는 방형으로 만든 돌의 상단부 양 모서리를 잘라내어 제작한 것이 특징적이며, 윗변의 양끝을 비스듬히 다듬은 비갈형 비석입니다.
현존하는 척화비들의 규모는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부산진 척화비는 높이 143cm, 폭 44.7cm, 두께 23.8cm, 가덕도 척화비는 128×145×16cm, 남해 척화비는 220×49×16cm, 산청 척화비는 높이 135cm, 폭 45cm, 두께 25.5cm, 홍성 척화비는 높이 122.7cm, 폭 44cm, 두께 25.5cm 규모로 확인됩니다. 비석은 대부분 거북을 본뜬 듯한 단조로운 모습의 받침돌이나 2단의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운 형태입니다.
척화비의 철거
척화비는 세워진 지 11년 만인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이 발생하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습니다.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전국의 척화비가 모두 철거되도록 지시되었습니다.
1882년 8월 5일 고종은 "이미 서양과 수호를 맺은 이상 서울과 지방에 세워놓은 척양에 관한 비는 시대가 달라졌으니 모두 뽑아버리도록 하라"는 전교를 내렸습니다. 서울에 세웠던 척화비는 1882년 음력 8월 15일 종로 보신각 부근에 파묻혔다가, 1915년 6월 보신각을 옮겨 세울 때 발견되어 경복궁 근정전 서쪽 화랑에 진열되었습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척화비 철거는 조선이 개항 정책으로 전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척화비는 삼전도비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역사의 증거라는 이유로 종종 페인트칠 등으로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현존하는 척화비
전국 200여 개소에 세워진 척화비 중 현재 30여 개가 전국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시도 유형문화재 또는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주요 현존 척화비로는 경복궁 척화비(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산진 척화비(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8호), 가덕도 척화비(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5호), 기장 척화비(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1호), 남해 척화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6호), 산청 척화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4호), 청주 척화비(충청북도 기념물), 구미 척화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호), 홍성 척화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3호) 등이 있습니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보관된 척화비는 2022년 10월 1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3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비석은 원래 강원도 횡성읍 횡성성당 정문 앞 개울에 버려져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많은 척화비가 원래 위치에서 이전되어 학교, 관공서, 박물관 등에 보관되고 있으며, 일부는 땅에 묻혀 있다가 후에 발견되어 복원되기도 했습니다.
척화비의 역사적 평가
척화비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대외정책과 시대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유물입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서양 열강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고 자주성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제국주의 열강의 무력 침략에 맞서 국가의 독립과 주권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명확히 표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척화비로 상징되는 쇄국정책은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한계도 분명합니다. 신미양요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승리였으나 군사적으로는 참패한 전쟁이었으며, 이후 조선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늦추게 되었습니다. 척화비 건립 불과 4년 후인 1875년 일본의 운요호 사건이 발생했고,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결국 개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척화비는 위정척사의 상징이자 동시에 천주교 박해와 순교의 증거물로도 평가됩니다. 현대에 와서 척화비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민족 저항의 상징이면서도, 시대적 한계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으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결론
척화비는 조선 말기 격동의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입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며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세운 척화비는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과 통상 수교 거부라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라는 비문은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적 위기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방식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척화비는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과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물입니다.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30여 기의 척화비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역사를 증언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우리에게 개방과 쇄국, 저항과 수용이라는 복잡한 역사적 과제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척화비를 통해 우리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