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청일전쟁 :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충돌

by NewWinds 2025. 6. 9.

서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 17일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충돌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했다. 이 전쟁은 아시아 국가가 유럽 열강을 제치고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며, 조선의 식민지화와 일본 제국주의의 본격적 확장을 촉발했다. 청의 패배는 봉건적 중화 질서의 종말을 알렸고, 조선은 "독립"의 이름으로 새로운 침략의 대상이 되었다.

전쟁의 배경과 발발 원인

조선 내부의 갈등과 열강의 개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고부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 정부는 청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는 1885년 텐진조약에 따른 청·일 양국의 조선 파병 권한을 발동시켰다. 청군 2,800명이 아산에 상륙하자, 일본은 "공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8,000명의 병력을 인천에 주둔시켰다.

일본의 전쟁 도발 전략

일본은 청과의 협상에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하며 전쟁 명분을 조성했다.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청 세력을 제거한 뒤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친일 정권을 수립했다. 이어 7월 25일 풍도 해전에서 청군 수송선을 기습 공격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주요 전투와 전개 과정

초기 교전: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

풍도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청의 제원함광을함을 격침시켰다. 이어 7월 28일 성환 전투에서 일본 육군이 청군을 격파하며 한반도 내 전략적 우위를 확보했다.

평양 전투와 압록강 해전

1894년 9월 15일, 일본 제1군은 평양에서 청군 15,000명을 포위해 2,000명의 사상자를 내며 승리했다. 이어 9월 17일 압록강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는 청의 북양함대를 괴멸시켰다. 청의 주력함 정원진원이 격침되며 해상 주도권을 상실했다.

위해위 공략과 청의 항복

1895년 1월, 일본은 위해위를 포위해 청의 잔존 함대를 궤멸시켰다. 청군 사령관 정여창은 자결했고, 북양함대는 항복했다. 이로써 청은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시모노세키 조약과 그 영향

조약 내용

1895년 4월 17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1. 조선의 독립 인정
  2. 요동반도·대만·팽호 열도 할양
  3. 배상금 2억 3,150만 냥 지불
  4. 청의 최혜국 대우 확대 등을 규정했다.

삼국 간섭과 요동반도 반환

러시아·독일·프랑스는 일본의 요동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 개입을 위협했다. 일본은 3,000만 냥 추가 배상과 교환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해야 했다.

조선에 미친 영향: 갑오개혁과 식민지화

갑오개혁의 추진

일본의 압력 아래 1894년 7월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어 개혁이 시작되었다. 주요 내용은

  • 과거제 폐지 및 신분제 철폐
  • 재정 일원화(탁지아문 설치)
  • 경찰제도 도입
  •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변경 등이었다.

개혁의 한계

개혁은 조선의 자주적 노력보다 일본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었다. 예컨대 노비제 폐지는 형식적이었고, 토지 개혁은 미봉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며 개혁은 친일 정권의 도구로 전락했다.

결론: 역사적 의의와 교훈

청일전쟁은 봉건적 중화 질서를 붕괴시켰으나,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으로 연결되었다. 조선은 "독립"의 허울 아래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이어졌다. 전쟁 기간 일본은 조선의 자원을 착취했으며, 동학농민군 탄압에 협력해 주민 2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2024년 현재,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역사 인식 갈등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일본의 신사참배 문제와 역사 교과서 논란은 전쟁의 잔재를 상기시키며, 평화적 공존을 위한 반성적 성찰이 요구된다. 역사학자 박태균은 "청일전쟁의 결과 형성된 제국주의적 구조가 오늘날 영토 분쟁의 뿌리"라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