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혜상공국 혁파 : 갑신정변 때 개화파가 전근대적 특권상업제도 폐지를 위해 주장한 개혁 정책

by NewWinds 2025. 10. 24.

혜상공국의 설립 배경

혜상공국 혁파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급진 개화파가 제시한 14개조 정령 중 9번째 조항으로, "혜상공국을 혁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혁파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혜상공국의 설립 배경과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혜상공국은 1883년 8월 16일 보부상들이 통리기무아문에 상소를 올리면서 설립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보부상들은 외국에서는 상국·상사·상회 등을 정부에서 보호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정부 관할 아래 새로이 자신들의 명의로 상국을 설립하여 상권을 침해받지 않도록 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요구에 적극적 관심을 보인 좌의정 김병국은 1883년 8월 19일에 고종에게 '혜상공국'이라는 상업기구 설립을 건의하였고, 고종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혜상공국 설립의 역사적 배경에는 1882년 임오군란과 개항이라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또한 1883년 인천과 서울 개항으로 조선 상인의 상권 보호 필요성도 대두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혜상공국을 설립하고 보부상 단체에게 상업적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혜상공국의 조직과 기능

혜상공국은 1883년 8월 김병국의 건의로, 1879년에 조직된 보상단과 1881년 조직된 부상단을 합하여 군국아문 소속 기구로 설립되었습니다. 고종은 병조에 명하여 혜상공국 관방을 조성하여 줄 것을 지시하는 한편, 친군영으로 하여금 보상인 좌상과 부상인 우상의 감독을 맡게 하였습니다. 또한 규식을 정하고 종2품 이상으로 관리를 제수하라고 명하였습니다.

혜상공국의 조직 구조는 중앙과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중앙기구에는 구관당상, 공사당상 각 1명과 총판 4명, 좌우 통령 2명을 두어 전국의 사무를 총괄하게 하였습니다. 지방에는 각 도에 감무관, 도접장, 방판을 1~2명씩 두고, 각 읍에는 반수, 접장 이하 임원을 두었습니다. 전직 관리를 감무관으로, 방판은 수령으로 겸임하게 하는 한편 도접장 이하 각읍 반수, 접장, 소임은 보부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혜상공국의 지도부는 구관당상에 민태호, 총판에 한규직·민영익·윤태준·민응식·이조연 등이 임명되면서 민씨 척족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이는 혜상공국이 단순한 상업 조직이 아니라 정치적 성격을 띤 기구로 변모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혜상공국은 보부상들에게 표신을 발급해 주고, 표신을 받은 보부상들은 지방 장시의 관리와 세금 징수 등을 담당하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정부는 혜상공국을 설립한 이후 이른바 상표라는 일종의 상업 허가증을 발행하였는데, 그 대상은 보부상뿐만 아니라 일반 상인도 해당되었습니다. 이는 전국의 상인을 혜상공국의 수세 체계 아래 두려 한 것이었습니다.

일반 상인에 대한 상표 발급과 상업세 징수를 산하의 보부상 조직인 임방에서 주도적으로 맡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보부상은 자신들과 그 밖의 상인을 구별하고 일종의 어용 상인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상대, 즉 군사적 목적을 겸행하는 자로 규정되어 화적과 상인을 사칭하는 자를 단속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혜상공국의 특권과 역할

혜상공국 소속 보부상은 치안 유지에 동원되었으며, 화적 체포에 공이 큰 보부상은 변장의 직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보부상은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는 대신 정보의 수집, 도적의 탐문과 체포 등에 앞장섰으며, 친정부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상대, 상병단, 공원 등을 자임하면서 경찰력과 준군사력, 준공무원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혜상공국의 설립으로 보부상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강화되고 좀 더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부상에게 일반 상인에 대하여 일정한 우위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혜상공국은 개항 이후 달라진 상업 환경에서 정부의 보호 아래 상업 활동을 전개하려는 보부상의 노력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혜상공국은 외국상인의 불법적 상행위를 막고 보부상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기구였지만, 갑신정변 당시 민씨 세력의 기반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들 보부상은 개별 보부상의 상업행위를 지원하여 그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하였고,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여러 특권들을 이용하여 지방 장시에서 상업유통기구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혜상공국의 폐단

혜상공국과 보부상들의 폐단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른바 '위국제해'라 하여 '상대·상병단'이라고 자임하면서 경찰력과 준군사력으로 역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집권세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면서 당시 집권세력인 수구당의 정치자금까지도 담당하였습니다.

보부상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여러 특권들을 이용하여 지방 장시에서 상업유통기구를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반 소상인이나 소민에 대한 침탈이 증대되었습니다. 세간에서 개별 보부상의 판·구매 활동까지도 부정적이고 적대적으로 인식하여 상업 자체뿐 아니라 사회적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정부의 비호를 받은 보부상들은 백성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켰습니다. 보부상들이 혜상공국의 특권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폐단이 증대하자, 이는 조선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폐단은 혜상공국이 단순한 상업 조직이 아니라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갑신정변과 혜상공국 혁파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하였고, 급진 개화파들은 14개조 정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14개조 정령 중 9번째 조항이 바로 "혜상공국을 혁파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갑신정변 세력은 민씨 척족의 세력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혜상공국을 폐지하려고 했습니다.

갑신정변 때 개화파들은 이들 보부상과 혜상공국은 정부의 강력한 비호 아래 봉건적 상업기구로 자신들의 특권을 기반으로 영세상인들을 제약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집권세력인 수구당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이들을 상공업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갑신정변의 14개조의 정강정책에서 '혜상공국의 철폐'를 주장하였습니다.

특권 상업 체제를 기반으로 이들을 보호 육성하려는 것은 개화파들이 지향하는 바와 차이가 있었고, 이는 결국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14개조 정령 중 9번째 조항인 "혜상공국을 혁파한다"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정령에서 혜상공국을 혁파할 것을 공식적으로 언명한 것은 이러한 폐단을 잘 보여줍니다.

혜상공국 혁파의 목적과 의미

혜상공국 혁파는 보부상을 비롯한 전근대적 특권상업제도의 폐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보부상 제도 등 전근대적인 특권상업제도를 폐지하면 보부상들이 민비 수구파 세력의 폭력조직원 되는 것을 차단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회사형태의 자유상업과 기업들을 융성하는 조건을 만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갑신정변 이후 신정부의 경제개혁 방향이 전근대적 경제재정을 정책적으로 해체시키고 근대 자본주의적 산업 경제를 건설하려는 방향임을 나타낸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 독점'을 위해 조선의 상업 특권 세력을 무력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정변 주도세력은 1884년 정변에서 '혜상공국을 혁파한다'는 조항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특권적 상업체계를 해체하고 자본합작적 상업체제로의 전환을 추구했습니다. 혜상공국 혁파는 단순히 하나의 기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경제 구조를 근대적으로 전환하려는 개혁 의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정부 세력은 친청 정책과 보부상(혜상공국) 보호를 추진하였던 반면, 갑신정변의 급진개화파 세력은 친청 정책 폐기와 혜상공국 혁파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정치적 노선의 차이를 넘어서 경제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갑신정변의 실패와 혜상공국의 존속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청나라 군대의 재개입으로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급진개화파의 주요 인물은 피살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혜상공국 혁파는 정변의 실패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갑신정변 세력은 민씨 척족의 세력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혜상공국을 폐지하려고 했지만, 정변의 실패로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정변 실패 후에도 보부상들이 혜상공국의 특권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폐단이 증대하자, 정부는 1885년(고종 22) 8월 혜상공국을 상리국으로 변경하고 내무부에 소속시켜 관리 감독을 강화했습니다. 1885년 8월 10일 혜상공국은 내무부에 속하게 하고 상리국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상리국으로의 개칭은 혜상공국의 폐단을 인정하고 이를 시정하려는 조치였지만, 근본적인 구조 개혁은 아니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개편하게 되고, 아울러 보부상의 혜상공국도 '황국협회'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1898년 황국협회가 만들어지면서 이에 이속되었다가, 1899년 상무사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1904년에 최종적으로 혁파되었습니다.

혜상공국 혁파의 역사적 의의

혜상공국 혁파는 비록 갑신정변의 실패로 즉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조선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전근대적 특권 상업 체제를 해체하고 근대적 자유 상업 체제로 전환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개화파들이 혜상공국 혁파를 주장한 것은 단순히 정치적 반대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조선의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보부상의 독점적 상업 특권을 폐지하고 모든 상인에게 평등한 상업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은, 근대적 시장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신정변의 14개조 정령은 비록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후 조선 사회의 개혁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혜상공국 혁파를 포함한 이러한 개혁 방안들은 이후 갑오개혁 등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면서, 조선 사회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혜상공국이 1904년에 최종적으로 혁파된 것은, 갑신정변 당시 개화파들이 주장했던 개혁 방향이 결국 20년의 시차를 두고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혜상공국 혁파가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시대적 필연성을 가진 개혁 과제였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