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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 : 이란 이슬람 혁명의 지도자와 그의 유산

by NewWinds 2025. 8. 30.

서론

20세기 후반 중동의 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일 것이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을 이끌어 2,500년 된 페르시아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한 호메이니는 현대 이란의 역사를 새롭게 쓴 인물이자, 중동 전체에 이슬람 부흥 운동의 불씨를 지핀 종교 지도자였다. 그는 단순한 정치 지도자를 넘어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영적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사상과 행동은 오늘날까지도 이란과 중동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 글에서는 호메이니의 생애와 사상, 이란 이슬람 혁명의 과정, 그리고 그가 남긴 정치적·종교적 유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생애와 종교적 배경

출생과 가문

세예드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는 1902년 9월 24일 이란 중부의 호메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시아파 이슬람 성직자 집안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시아파 종교지도자인 '물라'였다. 호메이니라는 이름은 그의 출생지 호메인에서 유래했으며, 그의 조상은 원래 인도에서 종교 교육을 위해 이주한 페르시아인이었다. 19세기 중반 그의 할아버지가 시아파 성지 나자프로 순례를 다녀오던 중 이란에 정착하면서 호메이니 가문이 이란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종교 교육과 성직자로서의 성장

호메이니는 어린 시절부터 이슬람 교육을 받았으며, 1922년에는 시아파 회교 중심지인 콤에 정착하여 이슬람 학교에서 공부하고 성직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슬람 법학과 철학, 신비주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깊은 지식을 쌓았으며, 점차 시아파 종교 지도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30년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경제적 안정과 지위 상승의 기회를 얻었고, 이는 그가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의 지도적 성직자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아야톨라 칭호 획득

1950년대 후반, 호메이니는 시아파 이슬람에서 신앙심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에게 주는 존칭인 '아야톨라'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야톨라는 이슬람교 시아파 최고지도자를 뜻하는 칭호로, 이란은 국민 대부분이 시아파여서 그의 영향력이 무척이나 컸다. 1960년대 초에는 이란 내 시아파 종교 공동체의 최고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정치적 활동과 망명 생활

팔레비 왕조에 대한 저항

호메이니의 정치적 활동은 1963년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의 '백색혁명'에 대한 반대로 본격화되었다. 백색혁명은 토지개혁으로 종교 영지를 축소시키고 여성을 정치적으로 해방하려는 팔레비의 친서방 개혁 정책이었다. 호메이니는 이러한 정책이 이슬람 가치를 훼손한다고 보고 강력히 반대했으며, 1963년 6월 공개적으로 팔레비를 '악의 상징'에 비유하고 그의 죽음을 경고했다. 또한 1964년 10월 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이란 주둔 미군의 치외법권을 허용하는 법안이 발표되자 "이슬람 정신을 팔아먹은 매국행위"라며 반발하며 반 팔레비 투쟁의 선두에 섰다.

추방과 망명 생활

호메이니의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그는 1964년 11월 터키로 추방되었다. 64세의 나이에 강제 추방된 호메이니는 이듬해 10월 시아파 이슬람의 성지인 이라크 내 나자프로 망명지를 옮겼다. 그는 망명 생활 중에도 팔레비 왕조 타도 운동을 계속 이끌었으며, 이란 내 추종자들과 연락을 유지하며 반정부 활동을 조직했다. 1978년에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호메이니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그를 국외로 추방했고, 호메이니는 프랑스 파리 교외의 노플르샤토 마을에 정착했다.

파리에서의 활동

프랑스 망명 시절, 호메이니는 파리 교외에서 반 팔레비 운동을 막후 지휘했다. 그의 설교 내용이 녹음테이프에 담겨 몰래 국경을 넘어 이란으로 운반되면 물라들은 테이프를 신도들에게 틀어주며 호메이니의 건재를 알렸다. 이 시기에 호메이니는 국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전 세계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할 수 있었고, 이란 내 다양한 반정부 세력들과 연대를 형성했다. 프랑스 정부는 한때 호메이니 암살을 팔레비 왕에게 제안했으나, 팔레비는 이 계획이 호메이니를 순교자로 만들 수 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슬람 혁명과 권력 장악

혁명의 발발과 팔레비 왕조의 몰락

1978년 말부터 이란 전역에서 팔레비 왕조에 대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1978년 9월 팔레비의 계엄령에 따른 군의 발포로 수백 수천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는 '검은 금요일' 사건으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총파업으로 경제가 거의 마비상태가 되었다. 믿었던 군도 동요하고 미국조차 망명을 권유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팔레비가 1979년 1월 16일 보잉기를 타고 황급히 이집트로 도망쳤다.

호메이니의 귀국과 환영

팔레비 왕의 망명 소식이 전해지자 호메이니는 "알라는 위대하다. 승리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15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1979년 2월 1일, 호메이니가 테헤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수백만 명의 이란인들이 그를 환영했다. 서방 매체들은 6백만~8백만 명의 혁명세력이 그를 환영한 것으로 추산했다. 누구도 혁명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사제복을 갖추어 입은 호메이니가 테헤란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자 600만 인파는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슬람 공화국의 수립

호메이니는 귀국 직후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팔레비 내각을 '불법'으로 선언했다. 2월 9일 왕정파와 호메이니 파 간에 격렬한 유혈 충돌이 벌어졌으나 군의 중립 선언으로 2월 11일 마침내 이슬람 혁명이 성공했다. 2월 11일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자르간을 총리로 한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1979년 3월 30일과 3월 31일, 임시 정부는 16세 이상의 모든 이란 국민에게 새 정부형태로서 이슬람 공화국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98% 이상이 왕정을 이슬람 공화국으로 교체하는 데 찬성했다. 4월 1일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신의 정부의 첫 번째 날'이라고 선언했다.

호메이니의 정치 사상과 통치 철학

벨레야테 파키(이슬람 법학자의 후견권) 이론

호메이니의 정치 사상은 그가 망명 생활 중에 저술한 '벨레야테 파키(이슬람 법학자의 후견권)'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호메이니는 이슬람 사회의 모든 법은 이슬람법에 기초해야 하고, 모든 법과 활동은 이슬람 율법의 이맘 기관(수호자)에 의해 감독되어야 하며, 이슬람 국가들은 공화국이어야 하며 왕조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사상을 기술했다. 이 책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궁극적인 정치적 구조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했으며, 호메이니는 이를 바탕으로 샤의 전제왕조를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종교 체제로 대체했다.

이슬람 법학자의 통치 개념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의 지도자는 성직자 집단에 의해 선택된 파키(이슬람 법학자)여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 파키는 절대권력을 가져야만 하며, 같은 성직자 집단에 의해서만 권력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중은 파키를 직접 선출하지 못하지만,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헌법에 따라 이란 국민들은 매 8년마다 이란 파키 회의라고 불리는 일단의 성직자들을 선출하며, 이들이 파키를 선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란의 지도자는 일반적으로 "최고 지도자"라고 불린다.

정치와 종교의 불가분성

호메이니는 "정치 활동은 종교적 임무와 책임이다"라고 주장하며, 정치와 종교의 불가분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슬람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이고 정치는 다른 문제들보다도 우선한다고 강조했다. 호메이니의 이론과 다른 이론과의 차이는 간단하다. 호메이니는 이슬람법에 정통한 이슬람법학자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무슬림들이 봉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압제자에 대한 저항은 무슬림의 첫 번째 의무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슬람 공화국의 정치 체제와 호메이니의 역할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구조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정치 체제는 호메이니의 벨레야테 파키 이론에 기초하여 설계되었다. 이란의 정치 체제는 이슬람 공화국으로, 1979년 4월 1일 이맘 호메이니의 주도하에 혁명이 승리한 후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이란 국민의 절대다수인 98.2%가 이슬람 공화국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최고 지도자, 즉 최고이슬람법학자(Vali-ye Faqih)가 국가원수를 의미한다.

최고지도자로서의 호메이니

호메이니는 1979년 12월부터 1989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했다. 그는 대통령보다 높은 최고지도자로 이란을 다스렸으며, 헌법은 최고지도자와 함께, 매 4년마다 선출되는 대통령을 규정하고 있으나, 수호 위원회에 의해 간접적으로 승인된 후보들만 취임할 수 있도록 했다. 호메이니 자신은 "혁명 지도자"로서 종신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호메이니의 통치 스타일

호메이니는 자신에게도 엄격하여 율법과 교리에 반하는 행동과 작은 뇌물 수수조차 엄격하게 처단했다. 측근들의 비리에 냉혹하게 대처하여 가까운 친척, 측근들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 자신은 청렴했지만 이슬람 율법을 지나치게 엄격히 적용해 이란의 발전을 가로막는 과오를 저질렀다는 평가도 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제한됐고, 여성은 다시 베일을 쓰는 등 인권을 억압받았다.

미국과의 관계와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미국과의 적대 관계 형성

호메이니의 이란은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이었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렸고, 호메이니는 미국을 "대사탄(Great Satan)"이라고 부르며 반미 정서를 고취시켰다. 혁명이 일어난 그해 11월 대학생들이 테헤란 미 대사관을 점거해 미국인들을 444일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1979년 11월 4일, 호메이니의 열렬한 추종자들로 구성된 일단의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급습하여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추가로 세명의 인질이 이란 외무부에서 잡혔다. 미국 대사 대리가 이란 외교부를 방문하여 보호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란 측은 묵묵부답이었다. 당초 시위대들은 미국인들에게 "우리는 당신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날 저녁 호메이니가 대학생들의 미국 대사관 점거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사태는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인질 사태의 전개와 영향

63명의 인질 중 13명이 2주 안에, 그리고 1980년 7월에 한 명이 추가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남자 50명과 여자 2명은 444일간 억류되어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라고 부른다. 미국 대사관 점거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치기간중의 부정부패 행위 재판을 위해 샤를 넘기라는 요구를 미국이 거절한 데 대한 대응이라고 정당화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질구출을 위한 특수작전을 강행했지만, 이 시도는 현지 상황에 대한 정보부족과 어설픈 사전준비, 급조된 지휘체계 등으로 실행전부터 삐걱거리다가 타바스(tabas)사막의 혹독한 기상상황에 이란군의 미사일에 헬리콥터가 격추, 추락하면서 잔해만 남긴 채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란-이라크 전쟁과 호메이니의 대응

전쟁의 발발과 전개

1980년 9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혼란을 틈타 이란을 침공했고, 이로써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호메이니는 이 전쟁을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수니파 대 시아파의 종교전쟁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무슬림 공동체, 움마 내부의 문제로 보았다. 호메이니는 이 전쟁을 이슬람 혁명을 수호하고 이란 국민의 단결을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전쟁의 종결과 영향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8년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호에 따라 종결되었다. 호메이니는 처음에는 이 결의안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독배를 마시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결정"이라고 표현하며 휴전에 동의했다. 이 전쟁은 양국에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으며, 호메이니의 사망 이후 이란의 권력구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호메이니의 사망과 유산

사망과 장례식

호메이니는 1989년 6월 3일, 86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백만 명의 이란인들이 참석했으며, 이는 이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장례식 중 하나였다. 호메이니의 시신은 테헤란 남부의 베헤슈테 자흐라 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묘소는 현재 이란의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후계자 선출과 권력 이양

호메이니의 사망 이후 이란의 권력구도는 갈등과 분열이 더욱 심화되었다. 혁명 초기 호메이니의 지지를 받았던 급진파로부터 보수파와 중도파로 권력 이동이 이루어졌다. 보수파의 상징인 하메네이가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임명되었고 1989년 8월 중도파의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호메이니의 사망, 이란-이라크 전쟁의 종식 및 소련의 붕괴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추진해 온 이슬람좌파 그룹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겨 주었다.

현대 이란에 미친 영향

호메이니가 수립한 이슬람 공화국 체제는 그의 사망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 이란의 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란에서는 히잡 규제와 같은 엄격한 이슬람 율법 적용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으며, 2022년 마사 아미니 사망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호메이니가 수립한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호메이니에 대한 평가와 비판

지지자들의 평가

호메이니의 지지자들은 그를 이란을 서구 제국주의와 부패한 왕정으로부터 해방시킨 영웅으로 평가한다. 그들은 호메이니가 이란의 독립성과 이슬람적 정체성을 회복시켰으며, 이란 민중들이 팔레비 왕으로 대표되는 친미 독재집단인 샤(Shah)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때껏 이란 석유를 거저 가져가다시피 하던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이란의 자원을 되찾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호메이니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하나로 1979년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오르기도 했다.

비판적 시각

반면, 호메이니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그는 이슬람 율법을 지나치게 엄격히 적용해 이란의 발전을 가로막았으며,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고 여성 인권을 억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핵무기 개발을 지시한 것도 호메이니였다는 주장도 있다. 호메이니의 이란혁명은 1차적으로는 부패한 정치권력과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 투쟁의 승리였지만 결국에는 세속적인 정부 대신, 이슬람교 경전인 '쿠란'과 이슬람법 '샤리아'로부터 정치적 권리를 신탁 받은 이슬람 성직자들이 직접 국가를 통치하는 중세적 신정체제의 부활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결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20세기 후반 중동의 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인물로, 그의 이슬람 혁명은 이란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슬람 법학자의 통치라는 독특한 정치 체제를 수립하여 이란을 신정 국가로 변모시켰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란의 정치 체제의 근간이 되고 있다. 호메이니의 반미주의와 이슬람 부흥 사상은 중동 전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유산은 현대 이란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호메이니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그가 현대 중동 역사의 중요한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사상과 행동은 이란과 중동의 미래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가 남긴 정치적·종교적 유산은 앞으로도 많은 연구와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호메이니는 단순한 정치 지도자를 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로서, 그의 삶과 사상은 현대 세계사의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