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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귀달 : 조선 전기의 강직한 문신으로,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허백당이라는 호로 불린 명재상

by NewWinds 2025. 10. 23.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학자인 홍귀달(洪貴達)은 1438년(세종 20)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여물리에서 태어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희생될 때까지 격동의 조선 전기를 관통한 인물입니다.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 또는 함허정(涵虛亭)으로 불리며, 시호는 문광(文匡)입니다.

가문과 출생 배경

홍귀달의 가문은 의흥홍씨의 부계 분파로, 아버지는 증 판서 홍효손(洪孝孫)이며, 어머니는 안강 노씨로 노집(盧緝)의 딸입니다. 증조부는 사재감정 홍순(洪淳), 조부는 홍득우(洪得禹)로 관직에 종사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부인은 상산 김씨로 김숙정(金淑貞)의 딸이며, 슬하에 홍언필(洪彦弼), 홍언승(洪彦昇), 홍언방(洪彦邦), 홍언충(洪彦忠), 홍언국(洪彦國) 등 다섯 아들을 두었습니다.

어려운 청소년기와 학문 수행

홍귀달의 청소년기는 극도로 가난했습니다. 7세 때부터 함창현 율리에 있는 김온교(金溫嶠)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집이 가난하여 늘 품 안에 도끼를 품고 다니며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송진을 따서 그 송진으로 불을 밝혀 공부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버선을 아껴 집을 나서면 어머니 몰래 버선을 벗고 맨발로 다녔다는 일화도 남아 있어 그의 어려운 가정형편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과거 급제와 초기 관직 생활

1459년(세조 5)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1461년(세조 7) 별시문과에 3등 1위로 급제했습니다. 당시 나이 24세였던 홍귀달은 1464년(세조 10) 겸예문에 등용되어 예문관 봉교로 승직하였습니다. 이후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었으며, 1466년(세조 12) 중시에 장원을 하여 선전관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시애의 난 평정과 승진

1467년(세조 13) 함길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홍귀달은 30세의 나이로 평사로 임명되어 허종과 함께 반란 진압에 나섰습니다. 이시애는 함길도절도사 강효문을 죽이고 스스로 절도사라고 자칭하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상황이었습니다.

홍귀달과 허종은 군사를 빠르게 진군시켜 반란군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으며, 특히 북청 마흘현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때 홍귀달은 허종과 함께 군관 차운혁 등을 비밀리에 적진으로 들여보내 토호들을 설득하여 귀순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어유소로 하여금 결사대를 이끌고 절벽을 기어 올라가 이시애의 본진을 습격하게 하여 대승을 거두고 이시애 형제를 사로잡았습니다.

이 공로로 홍귀달은 초자하여 공조정랑에 임명되고 예문관응교를 겸하게 되었으며, 이후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습니다.

성종 시대의 활약

성종 시대에 홍귀달은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조선 전기 문화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479년(성종 10) 도승지로 재직할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한때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1481년(성종 12)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3년에는 『국조오례의주』를 개정하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습니다. 1500년에는 왕명에 의하여 『속국조보감』, 『역대명감』을 편찬하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습니다.

허백당이라는 호의 의미

홍귀달의 대표적인 호인 '허백당(虛白堂)'에는 깊은 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성종 10년경 서울 남산 아래 띠집 한 칸을 짓고 '허백'이라는 당호를 걸고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999칸의 화려한 집을 짓고 산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 띠집을 본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실망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역시 홍귀달답게 여겼다고 합니다.

'허백'이란 원래 『장자』에 나오는 말로 '허실생백(虛室生白)', 곧 '마음을 비우면 밝음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는 뜻입니다. 비록 띠집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누우면 999칸 넓이만큼의 많은 생각들이 저절로 생겨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는 홍귀달의 정신적 경지와 철학적 사고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문학과 서예 방면의 업적

홍귀달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문장과 서예에 모두 뛰어났습니다. 그의 문장은 곱고도 굳세며 법도가 있었고, 특히 서사(敍事)를 더욱 잘하여 한때의 비명과 묘지가 다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글씨에도 능하여 당시 문한의 직책을 맡을 만큼 인정받았습니다.

그의 시문집인 『허백정문집』은 원집 3권과 속집 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집은 1611년(광해군 3) 외현손 최정호가 간행했고, 속집은 1843년(헌종 9) 후손들이 간행했습니다. 원집 권1에 시 419수, 권2에 기·서·소가, 권3에 비지·제문·잡저가 수록되어 있으며, 속집에는 시 636수와 각종 산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청석동노인탄」이 있는데, 이는 청석동을 지나다가 60세 된 초라한 행색의 노인과 만나 나눈 대화를 적은 것으로, 오랑캐에게 1남 2녀가 모두 끌려가고 늙은 부부만 남아 풀뿌리로 연명해가는 비참한 정경을 묘사했습니다. 「야문비곡」은 노년에 아내를 잃은 뒤 홀로 지내면서 계집종의 비통에 젖은 오열을 들으며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자신의 슬픔을 솔직하게 노래한 작품입니다.

무오사화와 연산군 시대의 갈등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홍귀달은 10여 가지 폐단을 지적한 글을 올려 왕에게 간언했다가 좌천되었습니다. 그는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고치도록 간언해서 미움을 사게 되었으나, 무오사화 때에는 큰 화를 입지 않고 잠시 파직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홍귀달은 성품이 강직하여 할 말은 하는 신하였기 때문에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기 싫어하던 연산군에게는 늘 거북한 존재였습니다. 특히 그는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면서도 무오사화 때 큰 화를 입지 않아 더욱 연산군의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갑자사화의 비극적 최후

1504년(연산군 10) 2월 21일, 세자빈을 간택한다는 명이 내렸는데, 홍귀달의 손녀가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당시 경기관찰사였던 홍귀달은 3월 11일 이 문제를 가지고 아뢰었습니다. "신의 손녀는 참봉 홍언국의 딸로 신의 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처녀이므로 대궐에 나가야 하는데, 마침 병이 있어 신이 언국을 시켜 사유를 갖추어 고하게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홍귀달이 문제가 된 것은 "지금 비록 곧 들게 하더라도 역시 들 수 없습니다"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이것이 왕명을 가벼이 여기고 따르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연산군은 이를 자신을 능멸하는 처사라며 진노하여 홍귀달을 국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홍귀달은 3월 13일 유배길에 오르며 집 안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함창의 한 전졸로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다. 성공한 것 역시 나로부터요 패한 것 역시 나로부터니, 무엇을 한스러워 하랴.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

부인 김씨는 홍귀달이 귀양지로 떠나자 심병이 도져 며칠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산군 10년 6월 16일, 연산군은 "전에 홍귀달이 손녀가 병으로 아직 예궐하지 못함을 와서 아뢰되, 비록 즉시 '예궐하게 할지라도 올 수 없으리라.' 하였으니, 말이 매우 공경하지 못하다. 이러한 자는 살려두어도 쓸모가 없다"라고 하며 교형에 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홍귀달은 경원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 단천에서 교살되어 67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인품과 성격

홍귀달의 성품은 여러 기록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그는 성품이 평탄하고 너그러워 평생에 남을 거스르는 빛을 가진 적이 없고 남이 자기를 헐뜯음을 들어도 성내지 않았으니, 그의 아량에 감복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서는 "한미한 신분에서 일어나 힘써 배워서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고 평가하며, "성품이 평탄하고 너그러워 평생에 남을 거스르는 빛을 가진 적이 없고 남이 자기를 헐뜯음을 들어도 성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격이 강직하여 부정에 끝까지 항거하는 면도 있었습니다. 시정이 날로 거칠어지매 여러 번 경연에서 옛일에 따라 간언을 진술하여 연산군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원칙을 중시하는 강직한 성품과 너그러운 포용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홍귀달의 학문과 사상

홍귀달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신진 사림의 학문적 경향을 이어받았습니다. 그의 문학관은 『허백정문집』의 「빙옥난고서」에서 잘 드러나는데, "시란 성정에 바탕을 두고 글귀의 뜻을 귀히 여길 뿐인데, 말을 과장하거나 아름답게 꾸며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데만 힘을 쏟음은 말류의 폐단"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조탁보다는 성정의 바름을 중시한 시관이 잘 드러난 것입니다.

그의 소는 모두 당시의 시대적인 폐단을 들어 직간한 내용으로, 간신의 풍모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히 문학적 재능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개혁 의지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후대의 평가와 복권

중종반정 후 홍귀달은 신원되었고, 시호 문광(文匡)이 내려졌습니다. '문광'이라는 시호는 문학에 뛰어나고 정치적으로 바른 길을 추구했다는 의미로, 그의 생애와 업적을 잘 표현한 것입니다.

1535년(중종 30년)에는 대제학을 지낸 남곤이 글을 짓고, 아들인 홍언국이 글씨를 써서 홍귀달 선생 신도비를 세웠습니다. 이 신도비는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남에서 가장 큰 신도비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화재와 유적

홍귀달과 관련된 주요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율곡리에 위치한 홍귀달 선생 신도비가 있습니다. 이 신도비는 높이 3.7m, 폭 1.4m의 거대한 규모로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신도비입니다.

또한 그의 묘소는 경상북도 문경 함녕현 전촌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손들이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홍귀달은 이웃한 함창의 임호서원에 배향되어 있기도 합니다.

가족사와 후손

홍귀달의 가족들도 갑자사화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막내아들 홍언국은 딸(홍귀달의 손녀)을 궁중으로 들이라는 왕명과 관련하여 아버지와 함께 곤경에 처했고, 평안도 곽산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부인 김씨는 남편이 유배를 떠나자 충격을 받아 4월에 세상을 떠나 집안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그러나 중종반정 후 가문이 복권되면서 후손들이 『허백정문집』을 간행하는 등 선조의 업적을 기리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현재도 부림홍씨 문중에서 홍귀달을 시조로 모시며 그의 유덕을 기리고 있습니다.

홍귀달이 조선사에 미친 영향

홍귀달은 조선 전기 문화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조선 초기 역사 기록 작업에 공헌했으며, 『속국조보감』, 『역대명감』 등의 편찬을 통해 역사 편찬 사업에도 기여했습니다.

문학 방면에서는 조선 전기 한문학의 발전에 기여했고, 특히 성정을 바탕으로 한 진실한 문학관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시는 "차분히 가라앉은 절제된 시정"을 보여주어 조선 전기 문학의 한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강직한 간신의 모습을 보여주어 조선시대 관료정신의 모범을 제시했습니다. 비록 갑자사화로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의 강직함과 원칙주의는 후대 사림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연산군과의 갈등에서 드러난 시대적 의미

홍귀달과 연산군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갈등을 넘어 조선 전기 왕권과 신권의 갈등, 그리고 전제왕권의 폭주에 대한 신료들의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홍귀달이 손녀의 입궐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가족을 보호하려는 개인적 동기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무분별한 요구에 대한 원칙적 저항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연산군이 "지금 비록 곧 들게 하더라도 역시 들 수 없습니다"라는 표현을 문제 삼은 것은, 이미 극도로 예민해진 그의 정신 상태와 절대왕권에 대한 집착을 보여줍니다. 홍귀달의 죽음은 갑자사화의 서막이 되었고, 이후 대규모 숙청으로 이어져 조선 정치사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홍귀달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신이자 학자로서, 문학과 정치 양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가난한 환경에서 학문에 정진하여 재상의 지위까지 오른 그의 일생은 조선시대 지식인의 전형적인 성공담이면서도, 동시에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정치적 갈등에 휘말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인물로 기억됩니다. 특히 허백당이라는 호에 담긴 철학적 의미와 성정을 바탕으로 한 문학관은 조선 전기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